정수기 뺨치는 나무, 대장균 99% 제거

조홍섭 2014. 03. 07
조회수 44415 추천수 0

해마다 160만 수인성 질병 사망하는 개도국…값싸고 안전한 정수 기대

MIT 연구진 고안, 나뭇가지 그대로 정수기 활용…생나무만 효과 한계

 

zy6.jpg » 스트로브잣나무 헛물관 벽에 있는 여과막에 붙잡힌 세균(초록색 입자)의 주사현미경 사진. 사진=이 등 <플로스 원>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기초적인 하수처리를 하지 못해 생기는 설사병 탓에 해마다 세계에서 사망하는 사람은 무려 160만명에 이른다고 세계보건기구(WHO)는 밝힌다. 이들의 90%는 5살 이하의 어린이이며 거의 개발도상국에 산다.
 

따라서 안전한 식수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급하는 일은 개도국에서는 최우선 과제의 하나이다. 무엇보다 우선 필요한 것은 각종 감염병을 일으키는 세균, 바이러스, 원생동물 등을 제거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염소나 자외선 소독, 끓이기, 모래나 여과 막을 이용한 정수 방법이 제안돼 있지만 비용이 많이 들거나 유지관리가 힘든 어려움이 있었다. 가난한 주민들이 자기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쉽게 만들고, 별다른 유지관리 기술이 필요 없으면서도 친환경적인 정수 방법은 없을까.
 

zy1.jpg » 나무 정수기의 얼개. 왼쪽은 속씨식물 오른쪽은 겉씨식물이다. 물(푸른 선)은 물관 또는 헛물관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과하면서 그곳의 여과막에서 세균이 걸러진다. 그림=이 등 <플로스 원>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 연구진이 이런 요건을 갖춘 적정기술을 내놓았다. 이정호 이 대학 기계공학과 박사과정생 등 연구진은 최근 온라인 공개학술지 <플로스 원>에 실린 논문을 통해 ‘나무 정수기’가 세균을 거의 완벽하게 제거하는 등 뛰어난 정수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이 주목한 것은 나무였다. 나무가 뿌리에서 가지로 물을 빨아올리는 것에서 값싸고 효율적인 정수기의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미국의 세쿼이어 거목은 키가 112m이다. 이보다 큰 나무가 없는 이유는 더는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란 설명이 정설이다.
 

나뭇잎에서 증산작용을 할 때 수증기를 내보내면서 생기는 마이너스의 압력이 뿌리가 물을 흡수하는 원동력이다. 뿌리에서 잎으로 물을 전달하는 곳은 나무껍질 바로 밑의 옅은 색의 무른 목질부(변재)이다.
 

변재에는 기다란 죽은 세포가 죽 이어진 물관 또는 헛물관이 분포하는데, 이들이 파이프라인처럼 물을 운반한다. 연구에 참여한 로히트 카르니크 교수는 미국 전국 공공 라디오(NPR)와의 인터뷰에서 나무의 물관에서 정수기를 떠올린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무에 가장 중요한 건 물관에 공기방울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만일 기포가 관을 막는다면 뿌리의 물은 잎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맙니다. 그래서 기포를 제거하는 장치가 필요한데 물관 옆에 나 있는 작은 구멍과 그곳의 여과막이 그런 구실을 합니다.

 

나무의 물관에는 애초에 정수기 여과막이 설치돼 있으니 그것을 통째로 정수장치로 이용한다면 여과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나무는 물관에 나 있는 나노(10억분의 1m) 크기의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유지하면서 물을 통과시키는 해결책을 진화과정에서 이미 마련해 둔 터이다.
 

zy2.jpg » 스트로브잣나무 헛물관의 단면과 길이 모습. 사진=이 등 <플로스 원>

 

zy3.jpg » 여과가 이뤄지는 헛물관 벽의 작은 구멍. 사진=이 등 <플로스 원>  

 

연구진은 북아메리카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일종인 스트로브잣나무를 재료로 써 실험을 했다. 이 나무의 헛물관 벽에 난 작은 구멍은 수 나노~500나노m 크기여서 미생물을 거르기에 적당했다.
 

실험방법은 중학교 과학실험처럼 단순했다. 나뭇가지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껍질을 벗긴 뒤 플라스틱 튜브에 꽂았다. 빈틈은 접착제로 메웠다.
 

그런 다음 통 위에 약간의 압력을 가하면서 물을 부었다. 압력에 밀린 물이 나뭇가지를 통과했다. 물감을 푼 물을 넣었더니 2~3㎜를 지나지 못하고 모두 걸러졌다. 세균으로 한 실험에서는 99.9%가 제거됐다.
 

pinefilter.jpg » 헛물관 벽의 구멍에 난 여과막에 걸러진 세균(초록색 입자)의 모습. 사진=이 등 <플로스 원>

 

정수기로서 가능성이 있으려면 쓸 만한 유량이 걸러져야 한다. 실험에서는 약 4㎝ 폭의 나뭇가지를 필터로 썼을 때 하루에 4ℓ의 물을 정수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한 사람이 쓰기에 충분한 양이다.
 

연구진은 실용적으로는 면적 10㎠, 두께 0.5㎝의 나무 필터 200개를 1ℓ 들이 통에 채운 뒤 0.7~3.5m 높이에 매달아 필요한 압력을 가하면 된다고 제안했다. 단, 필터용 나무는 매주 갈아줘야 하지만 장치는 몇 년은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zy4.jpg » 나무 정수기를 만드는 방법. 그림=이 등 <플로스 원>
 

이 ‘나무 정수기’의 한계는 생나무만 정수 효과를 낸다는 점이다. 마른 나무를 쓰면 물관의 막이 망가져 전혀 정수효과를 내지 않는다. 연구진은 “편리한 마른 나무로도 여과를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다음 연구 과제”라고 밝혔다.
 

재료로 쓴 스트로브잣나무를 해당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로 대체하는 연구도 필요하다. 겉씨식물은 속씨식물보다 물관 속 구멍이 많아 정수 효율이 높은 반면 속씨식물은 물관 내 구멍이 더 작아 아주 작은 바이러스를 제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Boutilier MSH, Lee J, Chambers V, Venkatesh V, Karnik R (2014) Water Filtration Using Plant Xylem. PLoS ONE 9(2): e89934. doi:10.1371/journal.pone.0089934

 

조홍섭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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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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