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도 비만 북극곰 성인병 없는 까닭
42만년 전 간빙기 때 북극 쪽 확산한 불곰 무리, 빙하기 때 고립돼 북극곰으로 종 분화
초고농도 지방 식사에도 끄떡 없도록 진화…대형 포유류로서 놀라운 진화 속도
» 알래스카의 눈밭 위를 걷고 있는 북극곰. 북극의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불곰에서 놀랍게 빠른 속도로 분화됐음이 드러났다. 사진=앨런 윌슨(Alan Wilson), 위키미디어 코먼스
250만년 전부터 북반구는 대빙하기로 접어든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4만1000~10만년 간격으로 되풀이됐다.
빙하기가 오면 동물들은 남쪽으로 후퇴했다가 간빙기를 틈타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고립돼 새로운 종이 탄생하기도 했다. 빙하기와 간빙기는 진화를 부추기는 풀무질이기도 했다.
42만4000년 전부터 시작된 간빙기는 무려 5만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따뜻해진 날씨에 기대어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에 살던 불곰의 조상은 북극 쪽 신천지를 향해 퍼져나갔다.
얼음층 시추조사에서 이 시기의 얼음에서 다량의 전나무 꽃가루가 나오는 것으로 미뤄 당시에 적어도 그린란드의 남서부는 한대림으로 뒤덮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불곰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지 않았다. 빙하기가 오자 불곰 무리는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일단의 불곰 무리는 남행 길이 막혀 고립됐다.
이들은 점차 추워지는 날씨에 적응하면서 다른 종이 되어갔다. 불곰은 이제 북극곰이 된 것이다.
»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 북부에 서식하는 불곰. 북극곰과 가장 가까운 종이지만 산딸기 등을 주로 먹는 잡식성이다. 사진=마쉬맬로우(Marshmallow), 위키미디어 코먼스
북극곰과 불곰은 가장 가까운 친척이지만 행동이나 생태, 형태가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식성에서 큰 차이가 난다. 불곰이 숲에서 산딸기 등을 주로 먹는 잡식성인데 견줘 북극곰은 얼음에 덮인 바닷가에서 주로 물범을 잡아먹고 산다. 이들은 언제 어떻게 별개의 두 종이 됐을까.
북극곰이 불곰과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은 디엔에이 염기서열 분석을 통해 이미 밝혀져 있다. 그러나 두 종으로 분화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과학자들 사이에 큰 논란거리이다.
화석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15만~80만년 전에 종 분화가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유전자 분석을 통한 일련의 연구에서 그 시기는 500만년 전과 60만년 전으로 크게 엇갈렸다.
최근 중국, 덴마크, 미국 등 국제연구진은 그린란드의 북극곰 79마리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불곰 10마리에서 시료를 채취해 디엔에이 염기 서열을 조사한 결과 이들의 종 분화가 34만3000~47만9000년 사이에 일어났음을 밝혔다. 국제학술지 <셀> 최근호에 실린 이 연구에서 저자들은 “지난 50만년 동안 가장 긴 간빙기 동안 불곰의 조상이 북극곰으로 분화됐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연구로 분화 시기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표본을 대상으로 한 연구라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고래 주검을 먹으려고 다가온 북극곰. 사진=앨런 윌슨(Alan D. Wilson), 위키미디어 코먼스
종 분화 시기와 함께 이 연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북극곰 게놈의 특이성이다. 북극곰의 유전자 2만개 가운데 20개가 불곰과 다른 특이한 구조였는데, 이들은 주로 심장 기능, 대사, 모피 색깔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20개의 특이 유전자 가운데 9개는 사람의 심장 질환과 관련된 것이어서 주목된다. 숲에서 나는 열매와 뿌리 등 건강식으로 배를 채우던 곰이 북극에 적응하면서 지방 덩어리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해당 유전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됐던 것이다.
다 자란 북극곰은 물범을 잡아 지방이 많은 피부와 지방층만을 먹는다. 그 결과 북극곰 성체의 피하와 내장에 낀 지방층의 무게는 체중의 50%에 이른다. 새끼에게 먹이는 젖의 지방 함량도 27%에 이른다.
이런 체질은 가혹한 북극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하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물범을 찾아다니려면 오랜 시간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지방으로 비축해야 하고 또 지방층은 장거리를 헤엄칠 때 필요한 추가 부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 북극곰의 주요 먹이인 고리무늬물범. 사진=리 쿠퍼(Lee Cooper),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람이나 다른 포유동물에 이런 정도의 지방은 고농도의 콜레스테롤과 동맥경화로 목숨을 위협할 것이다. 그러나 북극곰은 혈액에서 지방을 걸러내 세포로 보내는 유전자가 작동해 이런 부작용을 막아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이런 적응은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이뤄졌다. 12만년 전 북극곰의 화석에서 이미 해양동물을 주식으로 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고지방 식사에 대한 적응은 ‘불과’ 수십만년 동안 일어난 것이다.
연구자의 하나인 라스무스 닐슨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동물학자는 “북극곰은 독특한 초고농도 지방 식단에 재빨리 적응한 놀라운 동물이다. 대형 포유류의 종 분화에는 보통 수백만년이 걸린다.”라고 과학주간지 <뉴사이언티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또 북극곰이 심장과 순환계 질환을 극복한 사례는 사람의 성인병 연구에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 논문은 결론에서 “만성적으로 높은 수준의 지방과 콜레스테롤 섭취에 대한 유전적 대응이 이처럼 급격한 것은 이전에 보고된 바가 없다. 이는 사람의 심장 질환에 관한 유전적 원인을 찾으려면 표준적인 모델 동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라고 적었다.
» 빙하기의 기후변화가 북극곰을 탄생시켰다면 인위적인 지구온난화는 북극곰을 멸종으로 몰아가고 있다. 사진=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국(U.S. Fish and Wildlife Service), 위키미디어 코먼스
한편, 이번 연구에서는 북극곰이 불곰과 공통의 조상에서 단선적으로 분리돼 나온 것이 아니라 일단 분화한 북극곰과 불곰 사이의 교잡이 여러 차례 일어났음도 드러났다.
이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후변화가 북극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와도 관련된다. 북극의 얼음이 녹는 시기가 달라져 물범 사냥이 어려워진 북극곰 일부가 다시 조상처럼 숲에서 먹이를 찾기 시작했고, 이미 불곰과의 교잡이 이뤄지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기후변화와 함께 북극곰은 유전자 차원에서 차츰 멸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Shiping Liu et. al., Population Genomics Reveal Recent Speciation and Rapid Evolutionary Adaptation in Polar Bears, Cell 157, 785~794, May 8, 2014, http://dx.doi.org/10.1016/j.cell.2014.03.054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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