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 흘러 넘친 한탄강, 한반도 ‘막내 땅’

조홍섭 2009. 09. 02
조회수 49494 추천수 0
<9> 용암 흐르던 한탄강
드넓은 철원평야 논 사이로 뜻밖에 가파른 협곡
북한 오리산에서 분출…20~30m 깊이 용암 쌓여
 
 
■ 시리즈 차례 ■

제1부 격변의 시대
   1. 북한산의 기원    

   2. 이동과 충돌   
   3. 한반도의 속살   
   4. 시간이 바뀐 곳   
   5. 백두대간의 탄생   
   6. 한국의 갈라파고스    
   7. 120만년의 화산분출  
   8. 꺼지지 않은 백두산   
   9. 용암 흐르던 한탄강
   10. 땅이 흔들린다
제2부 생명의 땅
제3부 한반도 지질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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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패기 시작한 벼가 드넓은 철원평야의 논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 논 사이에 아래를 내려다  보기가 아찔할 정도로 가파른 협곡이 숨어있었다.
 
지난 21일 찾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의 대교천은 너른 들판을 칼로 베어낸 듯 깊이 패인 현무암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절벽에 기둥처럼 들어선 주상절리에 세차게 부딪친 계류는 방향을 돌려 맞은편 절벽을 때리며 빠른 속도로 흘러내렸다. 여울과 소, 작은 폭포를 잇달아 이루며 바닥과 벽을 깎아내면서 흐르는 이 협곡은, 대교천 하류의 한탄강과 만나기까지 1.5㎞ 구간에서 나타난다.
 
 
북한 땅인 평강 오리산과 그 동북쪽 ‘680m 고지’에 분출구
 
동행한 원종관 강원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유년기 계곡지형”이라며 “약 27만 년 전 용암이 이 하천 구간을 완전히 메운 뒤 새롭게 물길이 났기 때문에 이런 지형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협곡의 절벽은 3차례에 걸쳐 흘러온 용암이 굳어 생겼는데, 그 깊이가 20~30m에 이른다. 다시 말해, 협곡 좌우의 넓은 들판 밑에도 이 정도 깊이의 용암이 쌓여있다는 것이다.
 
그 많은 용암은 어디서 분출했으며 어디로 흘러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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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질학자 기노사키는 1937년 철원평야의 용암대지를 형성한 분출구로 지금은 북한땅인 강원도 평강 서남쪽 3㎞ 지점에 위치하는 오리산(해발 452m)과 여기서 동북쪽으로 24㎞ 떨어진 ‘680m 고지’라고 발표했다. 이 설명은 아직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오리산 화산체는 정상에 직경 400m가량의 분화구가 있는 것이 위성사진으로 확인된다.
 
점성이 작았던 용암은 꿀럭대며 분출을 계속해 낮은 지대로 흘렀고, 옛 한탄강의 물길은 불길로 바뀌었다. 강물과 만난 용암은 뜨거운 수증기를 내뿜으며 굳었지만, 가차없이 밀려든 용암은 곧 강을 넘어 주변으로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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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물 속 활화산에서나 볼 수 있는 베개용암이 삐쭉

 
임진강 하류인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는 율곡이 즐겨 찾던 정자인 화석정이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부근 임진강변에는 유장하게 흐르는 하류인데도 한탄강 협곡에서 보는 현무암 절벽이 서 있다. 용암이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증거다.

 
125179824333_20090902.JPG이문원 강원대 과학교육학부 교수는 “분화구에서 115㎞ 떨어진 이곳에 8m 높이로 용암이 쌓이려면 어마어마한 양이 흘러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탄강을 따라 흘러온 용암은 전곡에서 병목현상을 일으켜 임진강 상류 쪽으로 역류하기도 했다. 두 강의 합류점에서 현무암의 두께는 30m에 이르렀고, 여기서 12㎞ 상류인 선곡리까지 6m 두께의 현무암층을 남겨 놓았다.
 
한탄강이 영평천과 합류하는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 아우라지도 유명한 용암 병목지점이었다. 한탄강의 용암이 영평천으로 역류한 이곳에선 하와이의 물속 활화산에서나 볼 수 있는 베개용암이 물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용암이 물과 만나 거죽은 급히 식어 굳지만 안쪽에서 액체 상태로 계속 흐르면, 표면 틈으로 마치 치약처럼 삐져나와 굳어 생긴 것이 베개용암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철원을 두고 “들 가운데 물이 깊고 검은 돌이 마치 벌레를 먹은 것과 같으니 몹시 이상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한탄강의 특징은 바로 이중환이 가리킨 대로 ‘용암이 굳은 현무암 협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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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대 지층 밟고 절벽 아래로 내려오면 수억년 전 중생대 암석

 
협곡의 형성은 용암의 냉각과정과 관련이 있다. 이문원 교수는 “용암이 공기와 만나 급하게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 마치 논바닥이 갈라지듯 수많은 5각, 6각 기둥 형태가 만들어진다”며 “이런 주상절리가 침식돼 수직으로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가파른 절벽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절벽의 형태는 주변 암석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현무암 사이로 강이 흐르면 대교천처럼 양쪽이 가파른 협곡이 되지만, 강이 화강암 등 기반암과 현무암 사이를 흐른다면 현무암 쪽에만 가파른 절벽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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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에는 재인폭포, 직탕폭포, 고석정, 순담계곡 등 지질학적 명소가 많지만, 연천읍 신답리 수력발전소 밑 절벽에는 한탄강 용암분출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 숨어 있다.
 
절벽 맨 아래엔 강바닥에서 흔히 보는 굵은 자갈층이 깔려있다. 용암이 흘러오기 전 옛 한탄강의 강바닥이다. 그 위에 강물의 최후가 기록된 베개용암이 나타나고 이어 현무암이 판상절리와 주상절리 형태로 차곡차곡 쌓여 있다. 40m 절벽 꼭대기엔 식물이 자라는 충적층이 깔려 있다.
 
원종관 교수는 “신생대 지층을 밟으면서 절벽 아래로 내려와 수억년 전 중생대 암석을 만져볼 수 있는 곳”이라며 “한탄강은 용암에 의해 한반도에서 가장 젊은 땅이 만들어졌고 그 위로 가장 젊은 강이 형성되고 있는 역동적인 지형·지질학 현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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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철원/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통념 뒤엎은 발굴
용암분출 전 퇴적층에서 주먹도끼 등 유물 나와
구석기인들 끝없는 용암 강물 보며 끔찍했을 듯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은 오랫동안 구석기인들의 생활근거지였다. 한탄강 상류인 철원에서 임진강 하류인 파주에 이르기까지 수십 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됐다. 그렇다면 이들은 한탄강 용암이 분출하는 장면을 목격했을까.
 
1978년 처음으로 전곡리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이래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었다. 연대측정 결과는 용암대지가 구석기 유물 퇴적층보다 먼저 생겼음을 나타냈다.
 
용암대지가 형성된 직후인지 아니면 그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인지는 논란이 있어도, 구석기인은 한탄강 용암이 식은 뒤 형성된 기다란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사냥동물을 쫓으며 이곳으로 찾아왔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선복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2003년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 구석기유적지를 발굴 조사해 이런 통념을 뒤엎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 교수는 용암 분포의 하류 쪽 끄트머리인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보다 3㎞ 하류인 경기도 문산읍 장산리 구석기 유적지를 조사했다. 놀랍게도 용암이 내려오기 전에 쌓인 하천 퇴적층에서 주먹도끼를 포함한 구석기 유물이 나왔다. 유적지의 고도가 용암대지보다 15~20m 높고, 퇴적층에 현무암에서 떨어져 나온 자갈이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 그런 주장의 근거였다. 이 퇴적층이 위치한 장산리 단구는 약 16만~23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됐다.
 
임진강 하류 초평도 근처에 살던 구석기인들은 아마도 끝없이 쏟아져 내려오던 용암이 강물 속에서 격렬하게 수증기를 뿜어내고 강을 넘어 벌판을 뒤덮던 끔찍한 기억을 두고두고 얘기했을 것이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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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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