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살 잣나무 원시림, 한국호랑이의 고향

조홍섭 2014.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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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북방계 식물 자생지 답사 ② 러시아 연해주 피단산

세계적으로 드문 온대 원시림 펼쳐진 시호테알린 산맥

주인은 잣나무, 한국 호랑이와 표범의 마지막 보루

 

ru1.jpg » 피단산 자연림에 쓰러져 있는 잣나무 거목.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본격적으로 농경을 하기 전 자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타임머신이 없어도 이런 궁금증을 풀 곳이 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는 식물원이 그곳이다.
 

지난달 7일 정식 명칭이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 지부 식물원 연구소’인 이곳을 찾았다. 숲에 들어서자 원시림은 아니지만 100년 이상 잘 보전된 곳임이 실감났다.

 

ru2.jpg » 블라디보스토크 식물원의 진드기 주의를 알리는 경고판.

 

이 숲의 주인인 쭉 뻗은 검붉은 수피의 잣나무가 신갈나무, 피나무, 음나무, 들메나무, 까치박달 등과 함께 병풍처럼 둘러섰다. 그 밑에는 약용식물로 유명해 국내에선 보기 힘들어진 가시오갈피가 흔하게 보였다. 습한 곳엔 100살 이상 된 전나무 거목이 들어섰고 황벽나무와 피나무의 거목도 자주 눈에 띄었다.
 

ru3_블라디보스토크 식물원 자연림.jpg » 블라디보스토크 식물원의 자연림.

 

동행한 권혜진 국립수목원 박사는 “평지인데도 큰 나무가 많은 것은 원시림이 사라진 뒤 저지대 노령림이 자연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 번도 도끼질을 당하지 않은 한반도 산림의 원형을 보려면 시호테 알린 산맥으로 들어가야 한다.
 

러시아 연해주는 동북아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원시림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 핵심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동 쪽으로 1100㎞ 길이로 뻗은 시호테 알린 산맥이다.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 한국호랑이)와 아무르표범(한국표범)의 최대 서식지이기도 한 이곳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방대한 온대림”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자연유산이기도 하다.
 

ru4_구난 트럭.jpg » 군용 구난트럭을 개조한 트럭. 시호테알린 등반에 필수품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피단산(해발 1332m)으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70㎞ 거리이지만 인근 리캬노프카 역에서 산자락까지 가는 데만도 5~6시간이 걸릴 정도로 도로사정이 나쁘다. 당일 산행을 위해 취재진은 트랙터 바퀴와 크레인을 장착해 개조한 군용 구난 트럭을 타야 했다.
 

산자락엔 곰이 열매를 따 먹느라 가지가 부러진 개벚지나무와 함께 자작나무, 가래나무, 피나무 등으로 이뤄진 2차림이 펼쳐졌다. 차에서 내려 본격 산행을 시작하자 해발 500m가 안 되는데도 우리나라 고산지대에서나 보는 주목과 고산식물이 나타났다. 계곡에서는 국내 고산에서도 보기 힘든 땃두릅나무와 린네풀, 그리고 남한에는 없고 북한에서도 천연기념물인 고산식물 돌부채가 보였다.
 

ru5.jpg » 산 중턱에 나타난 거대 주목.

 

ru6.jpg » 등산객이 불쏘시개로 쓰려고 쳐낸 잣나무 거목의 상처.

 

해발 650m부터 경사가 급해지면서 원시림이 펼쳐졌다. 350살로 추정되는 가슴 높이 지름 95㎝인 거대한 잣나무가 300년은 된 거제수 거목과 함께 길을 막아섰다. 잣나무는 500살까지 살 수 있다.

 

ru7_350살 잣나무.jpg » 350살로 추정되는 잣나무 거목.

 

그러나 제 수명을 다하기는 쉽지 않다. 파벨 크레스토프 박사는 “잣나무는 뿌리가 얕아 나무가 클수록 폭풍에 쉽게 쓰러진다”고 말했다. 땅에 넘어진 잣나무 고목 속에서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레스토프 박사는 “커다란 하늘소 애벌레가 안에서 나무를 갉아먹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ru7-1_잣나무 원시림.jpg » 잣나무 거목.  

 

ru7-2_우수리 자연보호구에서 넘어간 초대형 잣나무_2010_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극동 지부_우수리 자연보호구의 숲.jpg » 우수리 자연보호구에서 넘어간 초대형 잣나무. 사진=2010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극동 지부, <우수리 자연보호구의 숲>

 

잣나무는 다른 활엽수와 함께 시호테 알린 산맥의 숲을 대표하는 나무다. 연해주엔 아직도 이런 잣나무와 활엽수로 이뤄진 원시림이 3만 3000㎢가 남아있다.

 

강호상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수는 “연해주의 면적은 남한의 1.6배이지만 인구는 200만명에 지나지 않은 것이 원시림이 보전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라면서 “자연훼손의 주 위협 요인은 개발보다는 산불”이라고 말했다.
 

ru8.jpg » 잣나무와 함께 나타나는 거제수 거목.

 

중국 동북부의 잣나무 원시림은 백두산과 샤오싱안링(소흥안령) 산맥을 빼곤 모두 사라졌다. 크레스토프 박사는 “중국에서 호랑이가 거의 사라진 건 바로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잣나무에 기대어 살아가는 동물은 다람쥐부터 호랑이까지 30여종에 이른다. 그는 또 “한국의 강원도 산악지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전 다양성이 높은 잣나무가 있어 보호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상자 기사 참조).
 

ru9_돌부채2.jpg » 남한에는 없고 북한에서 천연기념물인 돌부채가 개화했다.

 

해발 950m에 이르자 잣나무는 전나무에 자리를 내주었다. 검은 열매를 잔뜩 매단 땃두릅나무가 그 밑을 뒤덮었고 숲 바닥엔 극지식물인 월귤이 깔려 있었다. 반짝이는 흰 수피의 사스래나무와 분비나무 고사목 지대를 지나자 키 작은 나무만 자라는 너덜지대가 정상까지 이어졌다.
 

ru10_땃두릅나무.jpg » 우리나라 고산지대에서 극소수가 분포하는 땃두릅나무가 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바위틈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 특산식물인 눈측백 비슷한 마이크로바이오타와 돌부채가 가득했다. 해발 1244m 지점에 오르자 남한에선 한라산 꼭대기에만 일부 남아 있는 고산식물 시로미가 출현했다.

 

ru10-1.jpg » 눈측백 비슷하게 생긴 시호테 알린 산맥 특산식물인 마이크로 바이오타 군락.

 

ru11.jpg » 피단산에서 만난 곤충.

 

최근 한라산 시로미를 조사한 권혜진 박사는 “한라산 시로미에 비해 이곳 시로미의 키가 훨씬 작아 같은 시로미 속의 다른 종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크레스토프 박사는 “이곳에서도 시로미는 흔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ru12_피단산에서 바라본 시호테 알린 산맥 산줄기.jpg » 피단산에서 바라본 시호테 알린 산맥 산줄기.

 

한라산과 피단산은 10도의 위도 차가 난다. 하지만 두 곳의 시로미는 약 2만년 전 빙하기 동안 연해주와 한반도 남단이 추위를 피해 살아남은 동북아 식물의 공동 피난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 /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동북아 잣나무의 고향은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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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분포하는 소나무속 나무는 175종에 이른다. 이 많은 소나무 가운데 학명에 ‘한국’이 들어간 유일한 나무가 잣나무이다. 잣나무의 영어 명칭은 ‘한국 소나무’이다.
 

잣나무는 목재와 씨앗인 잣의 쓸모가 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림 수종이기도 하다. 전국의 잣나무 숲은 무려 21만㏊에 이른다.  신라 때부터 조림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랜 조림 역사가 있기도 해 잣나무가 우리에게 무척 친근하게 느껴지는 나무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잣나무림이 가장 널리 분포하는 곳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동북부, 그리고 북한 개마고원 일대이다. 남한과 일본에선 대규모 숲 형태가 아니라 고산 지대에 점점이 분포한다. 우리나라에는 설악산, 오대산, 지리산 등에서 전나무, 신갈나무 등과 함께 자란다.
 

잣나무 천연림은 잣나무와 활엽수가 섞인 형태이며 동북아 산림을 대표한다. 6세기 이후 여진족의 농경과 19세기 러시아인의 정착, 20세기 초 대규모 벌목을 거치면서 동북아 자연림은 많이 파괴됐다. 대규모 잣나무 천연림이 남아있는 곳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동북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ru14_잣나무 혼효림의 단풍_크레스토프.jpg » 러시아 시호테 알린 산맥 잣나무 혼효림의 단풍. 사진=크레스토프

 

그러나 최근 분자 차원의 연구 결과 분포면적이 넓지 않은 우리나라의 잣나무가 러시아나 중국보다 높은 유전다양성을 지녔음이 드러나 눈길을 끈다. 김진수 고려대 교수(현 명예교수) 등 한국과 러시아 연구진은 한국, 중국, 러시아의 잣나무 자연림 12곳에서 채취한 시료를 분석한 결과 한국 잣나무의 유전변이가 가장 높고 중국, 러시아로 갈수록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국제학술지 <수목 유전학> 2005년 8월호에 실린 이 논문은 러시아의 잣나무는 한반도의 것이 확산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김 교수는 “동북아 잣나무의 분포는 빙하기의 영향을 받아 변해왔으며, 현재의 분포는 후빙기인 홀로세 때 남쪽에서 북쪽으로 확장했다고 보편적으로 설명한다”고 이메일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잣나무가 북쪽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집단 크기가 줄어들면서 상당한 양의 유전변이가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또 “이런 점에서 한반도, 특히 북한의 잣나무 분포지가 중요한 (빙하기) 피난처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ru15_외설악 권금성 잣나무 천연림_국립산림과학원.jpg » 외설악 권금성 잣나무 천연림. 사진=국립산림과학원

 

그러나 최근에는 한반도뿐 아니라 백두산 등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극동지역 안에서도 잣나무가 춥고 건조한 기후조건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잔존했다가 나중에 퍼져나갔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일본의 잣나무는 한반도를 통해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후 대륙과 고립돼 유전자 교환의 기회가 적었고 기후 변동에 따른 분포 변화를 겪으면서 유전변이가 다양해졌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러시아로 확산해 나간 잣나무의 ‘고향’은 일본의 피난처가 아닌 한반도를 포함한 러시아 이남의 피난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규모는 작지만 유전다양성이 높은 한반도 잣나무의 보전 가치는 매우 높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 교수는 “하루빨리 잣나무 자연집단과 주변 개체들에 대한 기초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며 “북한의 잣나무에 대한 연구와 중국, 러시아 등의 유전자원을 확보하고 보존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인터뷰 파벨 크레스토프 러시아 극동 식물원 원장

 

 “동북아 식물 연구, 국경 넘어 협력 강화를”
 
ru16_하벨 크레스토프 박사.jpg

 

“러시아와 일본 연구자가 쿠릴 열도와 홋카이도 식물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식물을 놓고 두 나라 학자가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종이 전체의 30%나 됐습니다.”
 

생물의 학명을 라틴어로 국제학술지에 기재하는 까닭은 애초 다를 수밖에 없는 일반명을 넘어 적어도 학자들끼리는 명칭을 통일하자는 뜻에서다. 크레스토프 박사는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 이유를 종을 규정하는 학술적 시각차뿐 아니라 이 지역 과학자들 사이의 소통 부족에서 찾았다.
 

그는 “동북아 지역은 생물학적으로 매우 특이한 지역이고 또 공통점도 많다”며 “동북아 지역 차원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국립수목원이 2012년 발의해 현재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 대만 등 동북아 7개국 8개 연구소가 참여하고 있는 ‘동아시아 생물다양성 보전 네트워크’(EABCN)을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북아는 무엇이 특별할까. 그는 “온대이지만 북미처럼 빙하기 때 얼음에 덮이지 않아 이때 살아남은 생물이 많다. 이 지역 활엽수 대부분이 이런 유존종이다. 참나무, 음나무 등이 그런 예다. 오랜 생존 역사를 지닌 다양한 생물이 사는 곳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이런 동북아 식물의 가치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그는 지적한다. “과학자들이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교육에 너무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한국과 중국이 인구밀도가 높은데다 산업화 속도가 빨라 이런 특별한 식물이 위협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잣나무가 그런 예라는 것이다. “잣나무는 이 지역 온대림을 대표할 만한 특별한 나무입니다. 잣을 땅에 묻어 이 나무를 퍼뜨리는 동물만도 다람쥐, 잣까마귀 등 대여섯 종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과도한 이용과 벌채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만 해도 지구 온난화로 잣나무의 생장이 좋지 않아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남한의 잣나무와 함께 머지않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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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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