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위해 목숨 바치는 동물, 귀뚜라미 수컷

조홍섭 201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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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적 오면 암컷 먼저 대피시키느라 사망률 4배, '기사도 곤충'

영국 연구진, 대규모 현장연구 결과 '암컷 괴롭힌다' 기존 이론 뒤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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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대상이 스페인 초원의 귀뚜라미. 이 귀뚜라미는 여러 개의 굴이 연결된 서식지에 산다. 사진=엑시터 대

 

실험실에서 귀뚜라미의 생식행동을 관찰하면, 수컷은 암컷을 겁주고 귀찮게 구는 존재이다. 자신과 짝짓기한 암컷에게 삽입한 정자 주머니를 빼내지 못하도록 다른 수컷의 접근을 차단할 뿐더러 암컷을 지겹게 따라다닌다.

 

하지만 야생 상태에서의 연구 결과, 귀뚜라미는 스토커가 아니라 암컷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던지는 기사도를 발휘하는 동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롤란도 로드리게스-무뇨스 등 영국 엑시터 대 생태학 및 보전 센터 연구진은 스페인 북부 초원에서 전례 없는 귀뚜라미 현장 연구를 했다. 3년 동안 96대의 적외선 카메라를 귀뚜라미의 집단 서식지에 설치한 뒤 귀뚜라미가 노래로 암컷을 유인하고 경쟁자를 물리치며 짝짓기를 하는 모든 과정을 기록했다.

 

귀뚜라미 등에는 인식용 표지를 하고 뒷다리 조직의 일부를 떼어내 디엔에이 분석을 해 번식 성공률을 측정했다. 무려 20만 시간에 이르는 촬영분을 분석한 결과는 이제까지의 귀뚜라미에 대한 인식을 뒤집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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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위해 등에 표지를 한 귀뚜라미들. 사진=엑시터 대 

 

연구 결과 짝이 없는 암컷과 수컷이 주요 천적인 새나 쥐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확률은 비슷했다. 하지만 수컷과 함께 있던 암컷의 생존률은 그렇지 않은 암컷보다 6배나 높았다. 반대로 암컷과 함께 있던 수컷의 생존률은 그렇지 않은 수컷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실제로 짝짓기한 암컷과 함께 있다가 천적의 습격을 받은 수컷은 암컷이 안전한 굴속으로 피하고 난 뒤에야 도망치는 모습이 비디오에 잡혔다. 연구책임자인 로드리게스-무뇨스는 "수컷은 자기 짝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이것을 기사도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자비로운 태도는 자신의 짝에게 국한되며 경쟁자에게는 공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컷끼리의 대결에서는 짝이 있는 쪽의 승률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귀뚜라미 연구 개요를 담은 동영상: '기사도 곤충'

 

 연인을 향한 이런 희생정신의 대가는 무엇일까. 짝을 지킨 수컷은 사망률이 높아 평균 수명이 짧아지는 대신 암컷과 짝짓기할 기회가 더 많고 자식도 더 많이 남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런 '기사도 정신'은 자신의 형질을 더 많이 남기는 보상을 받음으로써 자연에서 선택된 것이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짝을 지키는 행동은 암컷과 수컷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협동을 통해 진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 최근호에 실렸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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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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