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위해 목숨 바치는 동물, 귀뚜라미 수컷

조홍섭 2011. 10. 12
조회수 51491 추천수 1

천적 오면 암컷 먼저 대피시키느라 사망률 4배, '기사도 곤충'

영국 연구진, 대규모 현장연구 결과 '암컷 괴롭힌다' 기존 이론 뒤집어

 

cricket.jpg

▲연구 대상이 스페인 초원의 귀뚜라미. 이 귀뚜라미는 여러 개의 굴이 연결된 서식지에 산다. 사진=엑시터 대

 

실험실에서 귀뚜라미의 생식행동을 관찰하면, 수컷은 암컷을 겁주고 귀찮게 구는 존재이다. 자신과 짝짓기한 암컷에게 삽입한 정자 주머니를 빼내지 못하도록 다른 수컷의 접근을 차단할 뿐더러 암컷을 지겹게 따라다닌다.

 

하지만 야생 상태에서의 연구 결과, 귀뚜라미는 스토커가 아니라 암컷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던지는 기사도를 발휘하는 동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롤란도 로드리게스-무뇨스 등 영국 엑시터 대 생태학 및 보전 센터 연구진은 스페인 북부 초원에서 전례 없는 귀뚜라미 현장 연구를 했다. 3년 동안 96대의 적외선 카메라를 귀뚜라미의 집단 서식지에 설치한 뒤 귀뚜라미가 노래로 암컷을 유인하고 경쟁자를 물리치며 짝짓기를 하는 모든 과정을 기록했다.

 

귀뚜라미 등에는 인식용 표지를 하고 뒷다리 조직의 일부를 떼어내 디엔에이 분석을 해 번식 성공률을 측정했다. 무려 20만 시간에 이르는 촬영분을 분석한 결과는 이제까지의 귀뚜라미에 대한 인식을 뒤집는 것이었다.

 

cricket2.jpg

▲연구를 위해 등에 표지를 한 귀뚜라미들. 사진=엑시터 대 

 

연구 결과 짝이 없는 암컷과 수컷이 주요 천적인 새나 쥐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확률은 비슷했다. 하지만 수컷과 함께 있던 암컷의 생존률은 그렇지 않은 암컷보다 6배나 높았다. 반대로 암컷과 함께 있던 수컷의 생존률은 그렇지 않은 수컷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실제로 짝짓기한 암컷과 함께 있다가 천적의 습격을 받은 수컷은 암컷이 안전한 굴속으로 피하고 난 뒤에야 도망치는 모습이 비디오에 잡혔다. 연구책임자인 로드리게스-무뇨스는 "수컷은 자기 짝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이것을 기사도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자비로운 태도는 자신의 짝에게 국한되며 경쟁자에게는 공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컷끼리의 대결에서는 짝이 있는 쪽의 승률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귀뚜라미 연구 개요를 담은 동영상: '기사도 곤충'

 

 연인을 향한 이런 희생정신의 대가는 무엇일까. 짝을 지킨 수컷은 사망률이 높아 평균 수명이 짧아지는 대신 암컷과 짝짓기할 기회가 더 많고 자식도 더 많이 남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런 '기사도 정신'은 자신의 형질을 더 많이 남기는 보상을 받음으로써 자연에서 선택된 것이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짝을 지키는 행동은 암컷과 수컷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협동을 통해 진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 최근호에 실렸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열파 5일 노출 딱정벌레, 정자 75% 감소열파 5일 노출 딱정벌레, 정자 75% 감소

    조홍섭 | 2018. 11. 16

    기후변화 위협 실험으로 증명…후대까지 영향 나타나도시 대기오염도 곤충 생장 억제, 식물 방어물질 증가기후변화로 폭염 사태가 세계적으로 잦아지면서 생태계 파괴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생물 다양성이 낮아지고 생물량이 줄어드는지는...

  • ‘현상금’ 붙은 귀신고래, 연어 그물에 걸려 사라질라‘현상금’ 붙은 귀신고래, 연어 그물에 걸려 사라질라

    조홍섭 | 2018. 11. 15

    핵심 서식지 사할린 북동부에 대형 정치망 400틀 설치전체 200마리 “위험 매우 커”…19%가 한번 이상 그물 걸려 귀신고래는 이름만큼이나 이야기가 많이 얽혀있는 고래다. 무엇보다 국립수산과학원이 2008년 “사진으로 찍으면 500만원, 그물에...

  • 5m 거대 철갑상어, 양쯔강서 댐 건설로 멸종 위기5m 거대 철갑상어, 양쯔강서 댐 건설로 멸종 위기

    조홍섭 | 2018. 11. 13

    한국 등 동아시아 살던 세계 최대 철갑상어, 성체 156마리 남아유일 번식지 양쯔강 서식지 감소·수온 상승…“10∼20년 안 멸종”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자라는 민물고기는 잉어나 메기가 아니라 철갑상어다. 최대 5m까지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이 ...

  • 북극이 도요새의 거대한 ‘덫’이 되고 있다북극이 도요새의 거대한 ‘덫’이 되고 있다

    조홍섭 | 2018. 11. 12

    70년 동안 둥지 포식률 3배 증가…수천㎞ 날아와 위험 자초하는 셈레밍 등 설치류 먹이 급감하자 여우 등 포식자, 새 둥지로 눈 돌려새만금 갯벌에서 볼 수 있던 넓적부리도요는 지구에 생존한 개체가 400마리 정도인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멸종...

  • 개는 정말 말귀를 알아들을까개는 정말 말귀를 알아들을까

    조홍섭 | 2018. 11. 09

    단어 1천개 이상 구분하는 ‘천재’ 개도개 두뇌 연구 결과 단어 처리 뇌 영역 확인‘개는 나의 명령을 곧잘, 그것도 다른 개들보다 훨씬 잘 알아듣는다.’ 개 주인의 4분의 1은 자신의 반려견이 남의 개보다 더 똑똑하다고 믿는다는 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