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생식', 알려진 것보다 흔하다
아메리카살모사의 처녀 생식과 장기간 정자 보관 밝혀져
새 서식지 개척 위한 생식전략 가능성
▲수컷과 짝짓기 없이 새끼를 낳은 것과 같은 종의 아메리카살모사. 사진=미국질병관리본부(CDC)
포획한 어린 뱀을 수컷으로부터 완전히 차단한 채 몇년 동안 길렀는데 어느날 건강한 새끼를 낳았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능성은 둘밖에 없다. 잡히기 전 수컷이 삽입한 정자를 장기간 보관했다가 나중에 수정했거나, 아니면 수컷 없이 암컷 홀로 자식을 만드는 처녀생식을 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지만, 실제로 둘 다 벌어졌음이 분자생물학을 이용한 연구결과 밝혀졌다.
워렌 부스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 진화생물학자 팀은 국제학술지 <린네 학회 생물학>10월호에 실린 논문에서 북미산 다이아몬드방울뱀의 장기간 정자 보관과 아메리카살모사의 처녀생식 사실을 보고했다.
▲아메리카살모사의 머리. 사진=H. 크리스프, 위키미디아 커먼스.
부스 박사는 노스 캐롤라이나 수족관에서 한 살도 되지 않은 미성숙 상태에서 잡힌 어린 아메리카살모사 한 마리를 5년째 길렀다. 그 기간 동안 수컷이라곤 종이 다른 뱀과 한 번 만났을 뿐인데, 2009년 뜻밖에도 새끼 4마리를 낳았다. 모두 수컷이고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연구진이 디엔에이 지문 검사를 해 본 결과 유전자가 어미와 꼭 같았다. 일종의 복제인 처녀생식이 일어난 것이다.
수컷과 짝짓기를 하지 않고 새끼를 낳는 처녀생식은 사실 포유류에서만 없을 뿐 다른 생물군에는 꽤 널리 퍼져 있는 생식 방법이다. 보아뱀, 코모도왕도마뱀, 일부 상어, 칠면조 등에서 처녀생식이 관찰됐다.
▲다이아몬드방울뱀. 북미에 서식하는 독사이다. 사진=위키미디아 커먼스.
연구진은 또 다이아몬드방울뱀이 19마리의 새끼를 낳은 것에도 주목했다. 이 뱀도 1살이 안 된 어릴 때 포획해 사육했는데 5살 때 새끼를 낳은 것이다. 처녀생식처럼 보였지만 디엔에이 지문 검사를 해 본 결과 수컷과 정상적인 짝짓기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뱀 가운데 정자를 장기간 저장한다는 사실이 유전적으로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안다”고 밝혔다. 암컷이 정자를 오래 보관하는 동물에는 물고기, 새, 양서류, 곤충 등이 있으며 일부 박쥐도 몇 달 동안 정자를 보관하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포유류는 불과 몇 시간이나 며칠 동안 보관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처럼 5년간이나 장기간 정자를 보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아메리카방울뱀. 새 서식지를 개척하기 위해 정자를 5년간이나 보관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사진=팀 빅터스, 위키미디아 커먼스.
처녀생식이나 유전자의 장기 보관은 단지 이례적인 사례를 넘어 중요한 진화적 의미를 지닌다. 새로운 서식지를 개척해 나가는 암컷이 수컷과 만날 기회가 희박할 때 이런 전략을 채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녀생식에도 단점이 있다. 자손이 어미와 유전자가 똑같기 때문에 새로운 질병이나 천적에 대항할 다양성을 잃는다. 이런 손해를 감수하고도 집단이 확산할 이득이 더 크다면 이런 형질은 살아남을 것이다.
연구진은 과거 정자의 장기 저장 사례를 조사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태어난 새끼의 크기가 작고 사산 비율이 높은 것 등에 비춰 과거 정자의 장기 저장으로 보고된 사례의 상당수가 사실은 처녀생식인데 오인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부스 박사는 “처녀생식이 예외적인 현상이라기보다 진화적으로 훨씬 중요한 생식 방법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처녀생식이 유전적 다양성을 높일 수 없는 단점이 있지만 새로운 서식지 개척 등에 이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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