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코뿔소 멸종이 떠올린 토종 황새 멸종의 기억
베트남 정글서 발견 13년만에 절종, 밀렵꾼이 마지막 코뿔소 뿔 베어가
1971년 우리나라서 멸종한 황새도 같은 처지, 당시 제대로 자연보호 했다면…
▲야생에서 촬영한 베트남 자바코뿔소. 사진=세계자연보호기금.
1988년 베트남에서 자바코뿔소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만 소수가 살아남은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동물의 하나인 자바코뿔소가 아시아 대륙에도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뉴스였다.
작은 식물이나 무척추동물이 아닌 대형 포유동물이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때 발견된 것은 아쉽게도 밀렵꾼에게 도살된 암컷이었다.
죽은 자바코뿔소라지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줬다. 살아있는 다른 개체가 있다는 증거이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여우가 강원도 양구에서 죽은 채 발견돼 큰 관심거리가 된 적이 있다.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은 즉시 조사에 나섰다. 10~15마리로 추정되는 자바코뿔소가 베트남 남부 정글에 서식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베트남 당국도 이 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했고, 1998년엔 국립공원이 됐다. 캣 티엔 국립공원이 그곳이다.
▲조사단이 자바코뿔소 보호구역에서 발견된 올무(왼쪽)와 탐지견이 발견한 발자국. 사진=세계자연보호기금.
생존 사실이 밝혀지고 보호구역을 지정하면 자바코뿔소는 보전될 수 있을까. 개도국 자연보호의 비극은 이 지점에 있다. 가난한 농민은 두 가지 선택으로 내몰린다. 숲을 불태워 화전을 일구거나 밀렵꾼이 돼 생계를 이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정부는 보호구역을 제대로 관리할 역량과 재원이 없다.
이후 세계자연보호기금은 후속조사에서 자바코뿔소가 7~8마리로 줄어들었음을 확인했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정글에서 벌채와 밀렵은 계속됐다. 하지만 어린 코뿔소가 발견돼 생존의 가능성도 보여줬다.
하지만 자바코뿔소는 자취를 감췄다. 2009년 이 단체는 심층적인 서식지 조사에 나섰다. 이번에는 코뿔소를 탐지하도록 훈련받은 개까지 동원했다. 6개월 동안의 조사에서 단 한 마리의 자바코뿔소를 확인했다. 수거한 모든 배설물에서 채취한 유전자를 검사했더니 한 마리의 것이었다.
코뿔소는 없었지만 조사단이 제거한 올무만도 300개가 넘었고, 심지어 밀렵꾼의 초막도 나왔다. 세계적인 보호동물을 위해 조성한 국립공원이었지만 보전조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마지막 베트남 자바코뿔소의 두개골. 코뼈 부분이 도려내졌다. 사진=세계자연보호기금.
조사단이 베트남을 떠나기 전 시장에 큰 동물의 주검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자바코뿔소였다. 다리뼈에는 아직도 총탄이 박혀 있었고 두개골에는 코 뿔을 베어낸 흔적이 선명했다. 밀렵꾼의 소행이 분명했다. 연구진은 이 뼈에서 채취한 디엔에이를 배설물에서 확보한 것과 비교했더니 안타깝게도 일치했다.
트란 티 민 히엔 세계자연보호기금 베트남 지부장은 <비비시> 인터넷판과의 인터뷰에서 "코뿔소 보호를 위해 상당한 투자를 했는데도 그런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 비통하다"며 "이제 베트남은 귀중한 자연유산의 하나를 잃었다"고 말했다.
이로써 자바코뿔소는 아시아대륙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됐다. 자바코뿔소의 세 아종 가운데 인도 북부, 방글라데시, 버마에 살던 아종은 이미 멸종한 상태이다. 이제 자바코뿔소의 마지막 아종은 자바 섬의 서쪽 끝에서 50마리 이하가 살아남았을 뿐이다.
'멸종으로의 길' 세계자연보호기금(WWF) 동영상
베트남 자바코뿔소 멸종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불법행위를 한 밀렵꾼의 몰염치와 그를 밀렵으로 몰아넣은 가난, 그리고 관리를 소홀히 한 베트남 당국에게 있다. 하지만 코뿔소 뿔 소비자들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 코뿔소 밀렵은 최근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코뿔소 뿔을 약용으로 쓰는 아시아의 시장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자바코뿔소의 멸종 소식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황새 멸종 사례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마을 어귀 높은 나무 위에 둥지를 틀던 낯익은 텃새 황새는 한국전쟁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음성에서 발견된 마지막 황새 한 쌍
▲<동아일보> 1971년 4월 1일치 1면. 자료=네이버 기사라이브러리.
1971년 4월1일 <동아일보>는 1면에 황새 한 쌍이 충북 음성군 대소면에서 알을 낳아 품고 있다는 소식을 사진과 함께 커다랗게 보도했다. 그러나 이 낭보는 사흘 뒤 서울에서 내려간 어느 사냥꾼이 엽총으로 수컷 황새를 쏘아 죽이고 이튿날엔 암컷이 품고 있던 알 4개를 누군가가 가져감으로써 비극으로 끝났다.
남한에 있던 마지막 황새는 이렇게 사라졌다. 언론은 이 사냥꾼의 자수 소식을 실명과 주소를 공개하고 "몰지각의 총 휘두른 사냥꾼 검거" "내가 바로 천연기념물 죽인 죄인이올시다" 등의 제목을 달아 크게 보도했다.
그때 신문은 8면을 발행했고 이런 대대적인 ‘황새 소동’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 총재의 대통령 선거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때였고, 대학생들의 시위로 잇달아 휴강이 선포되는 등 유신체제 선포를 한 해 앞두고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화 세력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언론은 목숨을 건 시위와 반체제 인사의 체포 기사는 단신으로 처리하면서 황새 타령은 크게 보도했다. 우리나라의 첫 자연생태계 보도는 이렇게 출발부터 정치에 오염되었다.
▲무정란을 낳으며 홀로 살던 음성 '과부 황새'
당시 정부와 언론은 말로만 자연보호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언론은 황새가 왜 없어지게 됐는지 서식지 파괴와 오염, 밀렵 등을 전혀 분석하지 않고 사냥꾼이 황새 절종의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몰아갔다. 황새 이외의 다른 야생 동식물에 대한 기획기사도 전혀 없었다.
만일 황새 멸종을 계기로 언론이 자연보호 캠페인을 벌이고 정부가 실질적 보호에 나섰더라면 이제는 모두 사라진 여우, 늑대, , 표범, 호랑이 등이 마지막으로 보호될 기회가 됐을지도 모른다.
홀로 남은 음성 ‘과부 황새’는 그 뒤로도 해마다 무정란을 낳으며 쓸쓸히 지내다 1983년 농약에 오염된 먹이를 먹고 쓰러져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고, 이어 1994년 노환으로 숨졌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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