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치 전기요금 내준다면 직장동료라도…
영화로 환경읽기 9. <내일을 위한 시간>
일광욕과 개 산책 이면의 진짜 유럽 노동자의 삶
소비와 돈과 성장주의 너머 세상 보는 눈 가져야
» 유럽의 한 직장인 샌드라가 겪은 이틀 동안의 일을 통해 우리가 사는 '구조'를 이야기한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한 장면.
나도 그들도 돈이 필요하다.
샌드라는 아팠던 모양이다. 힘겹게 병세를 완화하고 직장으로 복귀하려고 하지만 회사와 동료들은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없는 동안에도 회사는 큰 어려움 없이 돌아갔다. 사장은 직원들에게 샌드라의 복직과 전 직원들에 대한 1000유로(약 130만원)의 보너스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제안을 한다.
직원들은 투표를 통해 “1년치 가스와 전기세”에 해당하는 1000유로를 선택한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two days one night)>은 이 상황에서부터 시작된다.
투표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동료 줄리엣은 샌드라와 함께 사장을 찾아가서 재투표를 요구하고, 사장은 이를 허락한다. 그때부터 주말과 휴일, 이틀 동안 샌드라는 열여섯 명의 동료들을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자신의 복직에 투표해줄 것을 호소한다.
» <내일을 위한 시간>의 포스터.
감독은 벨기에의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뤼크 다르덴이다. 우리나라에는 2015년에 개봉됐다.
1시간 35분의 러닝타임 동안 샌드라가 보낸 힘겨운 이틀의 시간을 덤덤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어떤 특별한 사건도, 기교도, 음악도 없이 카메라는 샌드라를 따라갈 뿐이다.
지독하게 단순한 구성과 형식과 내용이다. 아마도 감독은 이런 단순함을 통해서 관객들이 주제에 집중하고, 유럽 노동자들의 일상을 꼼꼼히 보게 하려고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디서 사는지, 무엇을 먹고 입는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 구조인지.
그들이 사는 세상의 구조는 돈에 기초하고 있다. 산드라의 복직이냐 1000유로의 보너스냐의 선택은 산드라의 돈이냐 동료들의 돈이냐의 선택과 마찬가지다.
산드라의 복직은 곧 산드라가 필요로 하는 돈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직장이 갖는 다른 의미는 모두 제거한다. 자아 성취나 삶의 보람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산드라의 남편은 “임대주택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힘들어하는 아내를 달래 기어코 동료의 집 앞에 데려다 놓고야 만다.
돈은 다른 동료들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의 봉급은 물론 1000유로의 보너스는 포기할 수 없는 선택지다.
동료가 없어지고 자신에게 추가 근무의 기회까지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휴일이지만 사람들은 휴식하지 않는다. 타일을 모으고, 축구를 가르치고, 마트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골목에서 자동차를 수리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잔디밭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개를 데리고 느긋하게 산책하는, 우리가 동경해 왔던 유럽인의 모습은 없다. 아등바등 삶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의 노동자들이 있을 뿐이다.
» 그들이 사는 세상의 구조는 돈에 기초하고 있다.
90분 정도의 시간이 계속 불편하다. 감독은 내 돈을 위해서 동료의 돈을 희생시켜야 하는, 정말 피하고 싶은 무안함의 자리에 관객을 동행시킨다.
동료는 산드라를 피하고, 가족끼리 싸우며, “사람들 좀 그만 괴롭혀”라고 힐난한다. 산드라가 힘든 만큼 관객도 견디기 어렵다.
“왜 이 힘든 상황을 꼭 이겨내야 하는 거지?” 라는 질문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샌드라와 남편 마누는 복직 외에 다른 선택은 고민하지 않는다.
“노래하는 저 새들”을 부러워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엔 좀 지나쳐 보이기도 하다.
포기하려는 순간, 한 움큼의 약까지 먹으니 말이다. 정말 직장은 목숨만큼의 가치를 지니는 걸까?
» 감독은 정말 피하고 싶은 무안한 자리에 관객을 동행시킨다.
안에서 보기, 밖에서 보기
“직장이 없으면 못 살아? 돈이 그렇게 중요해?” 팔짱을 끼고 산드라를 비웃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통해서 우리가 직장과 돈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구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한번 실감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가 과연 지속가능한, 맞는 구조인지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정치사상가로 알려진 더글러스 러미스가 썼다.1)
그는 경제성장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지만 오늘날 그것은 상식 또는 상수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 사회는 이것이 채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기보다 “어떻게” 이룰 것이냐 만을 고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구조 속에 함몰되어 있으면 ‘왜’라는 질문을 미루고 ‘어떻게’라는 질문에만 빠진다는 점에 동의한다. 사실 우리는 많은 개념과 가치들을 특별한 고민 없이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풍요로운 생활의 추구는 상식이고,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이다.
그 ‘정상적인 사고’ 속에서는 소비하기 위해 벌고, 버는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스펙을 쌓기 위해 다시 벌어야 하는 고리에 갇히게 된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것이 옳은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정상에 더 가깝다. (누군가가 만들었든 또는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든) 현재의 구조는 그러한 상식을 확대 재생산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짜여 있다. 시야를 그 구조 안에만 두면 말이다.
이러한 상황을 러미스는 빙산을 향해 달려가지만 내부에서는 여전히 일상적인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던 타이태닉호에 비유한다. 타이타닉호 외에 세상은 없다고 생각하면 현재 타이태닉호의 방식이 상식이 된다.
밖으로 나와 보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만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자. 어떻게 더 풍요롭게 살고 있을까라는 고민 외에 다른 고민이 생겨날 것 같다.
지금과 같은,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생활을 욕구해도 될까? 그 욕구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빙산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타이태닉호와 같은 궤적을 밟는 것은 아닐까?
구조 밖에서 보면 지구의 자원과 자체 정화의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이것은 수 십년의 지속성만을 기대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이 보일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밖에서 보면 말이다.
구조에서 걸어 나오기
» 결국 샌드라는 현재의 구조 밖으로 걸어 나온다.
카메라는 버스, 승용차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산드라의 모습을 자주 비춘다. 이틀 동안 그녀는 꽤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 행복해”라는 마지막 대사는 그래서 더욱 대견하고 상쾌하게 들린다.
만약 힘들었던 이틀이 없었다면 산드라는 그녀가 살아왔던 구조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올 수 있었을까? 누군가를 밀어내고 그 구조 속에 안착하지 않았을까?
이제 그녀는 “노래하는 저 새들처럼”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정해진 레인을 따라 맹목적으로 달리던 경주마가 레인을 벗어나 초원으로 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샌드라가 구조에서 걸어 나오기까지 힘들었던 이틀, 고민했던 이틀, 삶을 돌아봤던 이틀이라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세상의 구조 밖에서 보는 시야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이든 숙고와 성찰의 경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 힘들지 않은 경험만으로도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그것이 가능한 성찰의 역량을 갖출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바로 거기에 교육의 역할이 있다. 지식과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눈과 성찰의 힘을 키우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시민으로 키우는 것.
교육의 역할은 바로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 ‘이틀 후의 샌드라’가 많아지는 사회는, 지금과는 분명히 다른 사회일 것이다.
김희경/ 환경과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경기도환경교육센터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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