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새싹 뜯는 노루를 침방울로 알아본다
노루 침 속 화학물질이 쓴맛 내는 타닌 합성 부추겨, 입맛 잃게 만들어 피해 최소화
나무는 손상입으면 일차로 성장촉진 물질 분비, 이어 포식자 퇴치 이차 대사물질 합성
» 유럽 온대활엽수의 대표 수종인 너도밤나무. 노루 피해를 벗어나 당당한 큰나무로 자라기까지 화학물질을 분비하면서 대응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Malene Thyssen, 위키미디어 코먼스
어린나무가 내미는 여린 새싹은 노루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이다. 그렇지만 종종 노루는 새순을 몇 입 베어 물고는 갑자기 식욕이 떨어졌는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어린나무로서는 굶주린 노루에게 몇 입을 뜯기느냐는 생사가 달린 문제다. 새순 한두 개를 잃는다면 나머지 순을 빨리 자라게 해 큰 나루로 자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면 몇 년 버티지 못하고 경쟁이 치열한 숲 바닥에서 말라죽는 운명을 맞을 것이다.
» 유럽노루. 온대지역 활엽수림의 어린 나무를 뜯어먹는 대표적 동물이다. Jojo, 위키미디어 코먼스
온대 활엽수림에서 노루와 고라니 같은 사슴과 동물은 곤충 못지않게 위협적이다. 온대 활엽수는 관목과 달리 가시 같은 방어기구도 없다.
나무가 이런 동물들에 뜯길 걱정을 덜려면 길면 20년은 자라야 한다. 이 기간에 겨울엔 겨울눈을 거듭 먹이고 나머지 계절에 새순을 뜯어먹힌다. 곤충이 식물을 공격할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포유류일 경우 어떨지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독일 연구자들이 이 점에 착안했다.
» 독일 연구자들이 눈을 잘라내고 노루의 침을 바른 뒤 화학변화를 분석하기 위해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베티나 오제
베티나 오제 독일 라이프치히대 생물학자 등 독일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기능 생태학>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독특한 실험 결과를 보고했다. 유럽노루가 유럽에 널리 분포하는 활엽수인 너도밤나무와 개버즘단풍나무의 어린잎을 뜯어먹을 때 나무에 어떤 생리변화가 나타나는지 알아봤더니 노루의 침을 알아차리고 대응하더라는 것이다.
식물은 상대가 노루이든 사람이든 곤충이든 간에 몸체에 손상이 생기면 ‘부상 호르몬’인 자스모네이트를 분비한다. 성장을 촉진해 상처 부위를 복구하는 것이다. 이 호르몬은 동시에 이웃 나무에 위험이 닥쳤음을 알리는 경계경보 구실도 한다.
그런데 노루가 눈이나 싹을 뜯어먹으면서 잎 위에 침을 남기면 나무는 자스모네이트에 더해 일련의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먼저 살리실산의 생산을 늘리는 호르몬을 분비하는데, 살리실산은 이번에는 타닌이라는 쓴 물질 생산을 늘리도록 작용한다. 여린 잎을 먹던 노루가 갑자기 씁쓰름해진 뒷맛에 더는 잎을 뜯어먹을 기분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개버즘단풍나무의 눈을 잘라내고 유럽노루의 침을 바르는 연구진. 나무는 기계적인 손상을 받았을 때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베티나 오제.
연구자들은 나무의 싹을 가위로 잘라낸 뒤 유럽노루의 침을 잎 위에 피펫으로 떨어뜨리는 실험으로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책임자인 오제는 “노루가 없는 상태에서 싹을 잘라내면 나무는 살리실산이나 타닌을 만들라는 신호 호르몬을 만들지 않았고 대신 부상 호르몬만 만들었다.”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연구자들은 앞으로 다른 수종에서 어떤 방어전략을 펴는지 알아볼 예정이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Bettina Ohse et.al., Salivary cues: simulated roe deer browsing induces systemic changes in phytohormones and defence chemistry in wild-grown maple and beech saplings, Functional Ecology, DOI: 10.1111/1365-2435.12717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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