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새싹 뜯는 노루를 침방울로 알아본다

조홍섭 2016. 09. 26
조회수 21401 추천수 1

노루 침 속 화학물질이 쓴맛 내는 타닌 합성 부추겨, 입맛 잃게 만들어 피해 최소화

나무는 손상입으면 일차로 성장촉진 물질 분비, 이어 포식자 퇴치 이차 대사물질 합성


Malene Thyssen.jpg » 유럽 온대활엽수의 대표 수종인 너도밤나무. 노루 피해를 벗어나 당당한 큰나무로 자라기까지 화학물질을 분비하면서 대응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Malene Thyssen, 위키미디어 코먼스


어린나무가 내미는 여린 새싹은 노루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이다. 그렇지만 종종 노루는 새순을 몇 입 베어 물고는 갑자기 식욕이 떨어졌는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어린나무로서는 굶주린 노루에게 몇 입을 뜯기느냐는 생사가 달린 문제다. 새순 한두 개를 잃는다면 나머지 순을 빨리 자라게 해 큰 나루로 자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면 몇 년 버티지 못하고 경쟁이 치열한 숲 바닥에서 말라죽는 운명을 맞을 것이다.


Capreolus_capreolus_2_Jojo.jpg » 유럽노루. 온대지역 활엽수림의 어린 나무를 뜯어먹는 대표적 동물이다. Jojo, 위키미디어 코먼스


온대 활엽수림에서 노루와 고라니 같은 사슴과 동물은 곤충 못지않게 위협적이다. 온대 활엽수는 관목과 달리 가시 같은 방어기구도 없다.


나무가 이런 동물들에 뜯길 걱정을 덜려면 길면 20년은 자라야 한다. 이 기간에 겨울엔 겨울눈을 거듭 먹이고 나머지 계절에 새순을 뜯어먹힌다. 곤충이 식물을 공격할 때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포유류일 경우 어떨지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독일 연구자들이 이 점에 착안했다.


Bettina Ohse.jpg » 독일 연구자들이 눈을 잘라내고 노루의 침을 바른 뒤 화학변화를 분석하기 위해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베티나 오제


베티나 오제 독일 라이프치히대 생물학자 등 독일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기능 생태학>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독특한 실험 결과를 보고했다. 유럽노루가 유럽에 널리 분포하는 활엽수인 너도밤나무와 개버즘단풍나무의 어린잎을 뜯어먹을 때 나무에 어떤 생리변화가 나타나는지 알아봤더니 노루의 침을 알아차리고 대응하더라는 것이다.


식물은 상대가 노루이든 사람이든 곤충이든 간에 몸체에 손상이 생기면 ‘부상 호르몬’인 자스모네이트를 분비한다. 성장을 촉진해 상처 부위를 복구하는 것이다. 이 호르몬은 동시에 이웃 나무에 위험이 닥쳤음을 알리는 경계경보 구실도 한다.


그런데 노루가 눈이나 싹을 뜯어먹으면서 잎 위에 침을 남기면 나무는 자스모네이트에 더해 일련의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먼저 살리실산의 생산을 늘리는 호르몬을 분비하는데, 살리실산은 이번에는 타닌이라는 쓴 물질 생산을 늘리도록 작용한다. 여린 잎을 먹던 노루가 갑자기 씁쓰름해진 뒷맛에 더는 잎을 뜯어먹을 기분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Bettina Ohse2.jpg » 개버즘단풍나무의 눈을 잘라내고 유럽노루의 침을 바르는 연구진. 나무는 기계적인 손상을 받았을 때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베티나 오제.


연구자들은 나무의 싹을 가위로 잘라낸 뒤 유럽노루의 침을 잎 위에 피펫으로 떨어뜨리는 실험으로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책임자인 오제는 “노루가 없는 상태에서 싹을 잘라내면 나무는 살리실산이나 타닌을 만들라는 신호 호르몬을 만들지 않았고 대신 부상 호르몬만 만들었다.”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연구자들은 앞으로 다른 수종에서 어떤 방어전략을 펴는지 알아볼 예정이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Bettina Ohse et.al., Salivary cues: simulated roe deer browsing induces systemic changes in phytohormones and defence chemistry in wild-grown maple and beech saplings, Functional Ecology, DOI: 10.1111/1365-2435.12717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올해의 ‘뚱보’ 곰, 640킬로 ‘747' 선정올해의 ‘뚱보’ 곰, 640킬로 ‘747' 선정

    조홍섭 | 2020. 10. 26

    브룩스강 연어 잡이 나선 2200여 불곰 대상 온라인 투표 결과점보기에서 이름을 얻은 이 거대한 수컷 불곰이 연어 사냥 명당에 나타나면 다른 불곰은 자리다툼은커녕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바쁘다. 미국 알래스카 캐트마이 국립공원 및 보호구역...

  • ‘3D 가짜 거북 알’로 불법 유통망 추적‘3D 가짜 거북 알’로 불법 유통망 추적

    조홍섭 | 2020. 10. 23

    코스타리카서 현장 시험 성공, 1시간마다 위치 정보 전송입체(3D) 프린터로 만들어 겉모습은 진짜와 똑같고 안에는 위성 위치추적 장치를 넣은 가짜 거북 알이 개발돼 불법 채취꾼을 잡고 유통망을 파악하는 데 쓰일 수 있게 됐다. 중미 코스...

  • 우리 몸엔 늦가을과 늦봄 두 계절만 있다우리 몸엔 늦가을과 늦봄 두 계절만 있다

    조홍섭 | 2020. 10. 22

    늦가을엔 바이러스 감염 대응…‘겨울잠’ 단백질도 많아져온대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4계절은 가장 분명한 환경 변화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몸은 4계절이 아닌 2계절을 산다는 사실이 분자 차원의 추적 연구결과 밝혀졌다.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자...

  • 꽃샘추위 한 번에 어린 제비 사망률 곱절로꽃샘추위 한 번에 어린 제비 사망률 곱절로

    조홍섭 | 2020. 10. 21

    더워진 봄 산란 앞당기면 새끼 굶주릴 위험 커져, 30년 장기연구 결과기후변화는 평균으로 오지 않는다. 봄은 일찍 찾아오고 평균기온은 오르지만 꽃샘추위는 잦아진다. 동물이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 장기 현장연구로 밝혀...

  • 한국인에는 비만과 당뇨 막는 ‘쌀밥 유전자’ 있다한국인에는 비만과 당뇨 막는 ‘쌀밥 유전자’ 있다

    조홍섭 | 2020. 10. 19

    인도보다 3천년 앞서 쌀 재배, 고혈당 막는 유전적 적응 일어나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은 오랜 벼농사 덕분에 고탄수화물 식사로 인한 비만과 당뇨병 등의 부작용을 막는 유전적 적응을 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오랜 목축 역사가 있는 유럽 ...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