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면 추방 앞장서다 스러진 ‘하얀 민들레’ 이정림씨
대전 석면공장 인근서 학교 다니고 거주 뒤 악성중피종 걸려
국제 석면 반대 캠페인 앞장, 1회 환경보건시민상 수상 이튿날 타계
▲2010년 12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캐나다 석면 수출 반대 기자회견장에서 이정림씨가 자신이 어떻게 석면 암에 걸렸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공해병 환자 1호’. 연탄공장이 쌓아놓은 석탄가루 때문에 진폐증에 걸린 서울 중랑구 상봉동 주민 박길래씨는 57살로 타계하기까지 공해피해 주민을 위한 운동에 몸을 던졌다. 사람들은 그를 ‘검은 민들레’라고 불렀다.
이정림(46·경북 김천시 삼락동)씨는 박씨가 진폐증으로 콜록이던 시기인 1981~1984년 동안 대전시 서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3㎞ 떨어진 곳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석면 시멘트 공장의 하나이던 벽산슬레이트가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씨는 1991년 결혼 직후 다시 공장에서 1㎞도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에서 2년을 살았다.
2006년 이씨는 서울삼성병원에서 악성중피종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악성중피종은 주로 석면에 노출돼 걸리는 치명적인 암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대전 지역의 악성중피종 환자 발생이 다른 지역보다 높다는 데 주목하고 있었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장 의 문제 제기에 대전시가 역학조사에 나섰고, 이 지역에서 악성중피종에 걸린 사람이 37명으로 전국 평균보다 68%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씨가 살던 아파트 주민 가운데에서도 이 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2명이나 더 있었다.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을 두고 있던 이씨는 기가 막혔다. 치명적 먼지를 흩날리던 석면공장이 지척에 있었다는 것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왜 40대 중반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아직 어린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이씨의 분노는 석면추방운동으로 이어졌다. 2010년 10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석면추방네트워크 국제회의에 참석해 피해사례를 발표하고 석면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로리 카잔 알렌 국제석면추방사무국 대표는 이런 이씨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레이철(이씨의 영어 이름)은 놀라운 여성이다.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암의 원인이 석면 때문이란 것을 알고 또 아직도 아시아 여러 나라가 석면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몸소 나섰다. 특히 한국이 인도네시아에 석면공장을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미안해 하며 아시아 지역에서의 석면 추방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2010년 12월 캐나다의 아시아 석면 수출 반대 캠페인에 참가한 이정림씨의 모습.
그해 12월엔 아시아 시민 대표단의 일원으로 신규 석면 광산을 개발해 전량 아시아로 수출할 예정이던 캐나다 퀘벡의 석면광산 개발을 막기 위한 현지 캠페인에 참가하기도 했다.
힘든 일정이었지만 그는 삶의 활력을 얻는 듯했다. 지난 9월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이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도 회의에 가실 수 있겠어요?” 곧바로 이씨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당연히 가야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일정을 조정하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못 가게 할까봐 아프다고 말도 못해요. 아들을 데려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고 3이라 학교에서 허락을 안 해요.”
이미 지난 11월14일 인도 자이푸르 아시아석면추방네트워크 회의에 참가하기 전부터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삶을 불사르는 듯 발표와 기자회견 등의 일정을 열정적으로 소화했다.
지난 20일 환경보건시민센터, 환경과 공해연구회 등 시민단체들이 주는 제1회 환경피해시민대회 환경보건시민상 수상자로 이씨가 선정됐다. 하지만 이씨는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도, 상패를 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튿날 그는 숨을 거뒀다.
▲지난15일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한 이정림씨를 위해 구요비 신부(환경보건시민센터 공동대표)가 병상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그의 타계 소식을 들은 캐나다의 석면추방운동가 캐슬린 러프는 “레이철은 자신의 가슴으로 호소했고 그래서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는 챔피언이고 진정한 투사이며 아름다운 친구이자 사랑스런 엄마이다”라고 안타까와 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보통의 악성중피종 환자는 병원을 떠나지도 못하는데 이씨는 다른 피해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운동에 나서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며 “박길래씨가 일본 등에 다니면서 공해 피해자를 위해 헌신한 ‘검은 민들레’라면 이씨는 석면의 무서움을 알리고 피해자 운동의 홀씨를 퍼뜨린 ‘하얀 민들레’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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