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현장서 사라진 고라니, 그 후
신고 받고 출동한 사고지점에 핏자국만 남아, 2차 사고 막으려 수색
마침내 농수로 안에서 발견된 고라니는 이미 다른 사고로 발 하나 못써
» 우여곡절 끝에 구조한 고라니는 이미 다른 사고로 다리 하나를 거의 잃은 상태였습니다.
어느 한적한 도로에 고라니가 차에 치인 채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았습니다. 다친 고라니가 계속 도로 위에 머문다면 다른 차량에 의한 새로운 충돌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죠. 신고자에게 적어도 고라니를 갓길로 옮겨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녀석을 포획할 도구를 챙겨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신고자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고라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로 위에서 약간의 혈흔을 발견할 수 있었고, 적어도 고라니가 차에 치여 얼마 전까지 이곳에 있었으리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 사고 현장에 도착했지만 어디에도 고라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라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딘가로 이동했거나,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 누군가가 고라니를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전자를 가정해 주변에 고라니가 있는지부터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도로 양쪽에는 작은 건물과 농토가 곳곳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의심되는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고라니를 찾을 수 없었고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수색 대상은 경사가 급해 접근을 막는 울타리가 설치된 곳이었습니다. 보통 고라니라면 뛰어넘기에 그리 높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차량에 치인 상태로 이곳을 넘어가긴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 도로 옆 울타리 넘어 있는 농수로, 설마 고라니가 이곳을 뛰어넘어 갔을까요?
고라니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울타리를 넘어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경사를 따라 내려가니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 작은 수로가 있었습니다. 무심코 수로를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수로 바닥에 고라니의 발자국이 떡하니 찍혀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수로 바닥에 찍혀있는 고라니의 발자국.
이 고라니 발자국이 정말 우리가 찾던 녀석의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녀석의 것인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만약 녀석이 맞는다면 포획해 상태를 살피고 필요하다면 구조센터로 데려가 치료를 해야 했죠. 수로 내부로 이어지는 발자국을 따라 들어가기로 합니다.
» 야생동물을 구조하는 과정은 무엇보다 구조자의 안전을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 물론, 그만큼 중요한 것은 고라니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겠죠.
수로 내부의 구조가 어떨지는 들어가기 전엔 알 수 없습니다. 갑자기 물이 깊어질 수도 있고, 어두운 곳이니 내부의 구조물로 인한 사고 역시 조심해야 하죠. 장화를 신고, 라이트를 들고 조심스럽게 내부로 들어갑니다.
» 고라니의 발자국을 따라 수로 내부로 계속해서 들어갑니다. 부디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요.
한참을 들어가자 인기척이 들려왔습니다. 라이트를 비춰보니 저 멀리에 고라니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녀석을 추적한 결과, 다행히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사고를 겪고, 낯선 환경에 놓여 예민해졌을 녀석을 포획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많이 지쳤는지 녀석은 그다지 힘껏 저항하지 못했고, 결국 포획할 수 있었습니다. 이 어두운 곳까지 다친 몸을 이끌고 힘겹게 와야 했던 녀석이 딱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수로 내에 갇혀있던 고라니를 포획하는 현장 영상입니다.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보시죠!
아마 이러했을 겁니다. 차에 치이는 사고를 겪은 고라니는 불행 중 다행인지 충돌 자체가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불편한 몸을 이끌고 현장을 제대로 벗어나는 것까지는 어려웠겠죠.
도로 옆 울타리를 넘은 뒤 아마도 발을 헛디뎌 경사면을 데굴데굴 굴러갔을 겁니다. 그러다가 수로에 떨어졌고, 빠져나오기 위해 헤매던 중 자신도 모르게 더 깊이 들어가 어두운 곳에 갇혀버린 것이죠.
»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고라니가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녀석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오른쪽 뒷다리의 골절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본 결과 다리의 골절은 차량 충돌 사고를 겪은 최근이 아닌 조금 더 오래전에 생긴 상처였습니다. 살아가다가 어떠한 사고를 겪어 사실상 다리를 잃은 상황이었고, 세 다리로 살아가는 것이 녹록지 않았는지 꽤 수척하고 마른 상태였습니다.
다리를 다친 것도 서러운데, 또 차에 치이고, 경사로를 구르고, 수로에 빠지고 얼마나 서러웠을까요? 무엇보다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도 꼭 도로를 건너야만 했는지, 그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여실히 느껴져 안타까웠습니다.
» 오늘의 사고 이전에 이미 오른쪽 뒷다리를 잃는 사고를 겪었던 고라니였습니다.
고라니는 조금 더 안정을 취한 다음 며칠 뒤 오래전 부러진 다리를 제거하는 수술을 할 예정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고라니가 세 다리로나마 다시금 힘차게 일어나 박차고 나가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오늘 하루를 고단하게 보냈을 고라니에게 많은 응원을 부탁드릴게요.
» 어두웠던 터널을 지나온 고라니의 삶에도 빛이 비치길 응원해 주세요.
글·사진 김봉균/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재활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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