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대국 프랑스의 새 안전 패러다임, ‘하드 코어’를 지켜라
절대 안전 도그마 포기, 중대 사고 때 피해 최소화 위해 핵심 시설 보강
프랑스 원자력안전청, 올 상반기 중 166억 달러 투자 예정
▲프랑스 카트놈의 원전 단지. 중대 사고에 대비한 대대적 보완이 올 상반기에 이뤄질 예정이다. 사진=위키미디아 커먼스.
유럽 각국은 지난해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자국 원전의 안전성을 재평가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해 그 결과 보고서를 연말까지 유럽연합에 제출했다. 지난 3일 프랑스 원자력안전청도 그 보고서를 발표했다.
프랑스 원전은 즉각적인 가동중지를 요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안전하지만, 동시에 앞으로도 운전을 계속하려면 기존의 안전 기준을 뛰어넘는 보완책이 시급하게 마련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언론은 물론 환경단체들도 특별할 것 없는 이 발표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고, 단지 안전 보완에 100억 달러 이상의 거액이 든다는 사실을 환기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과학전문지 <네이처>는 12일치에서 사설과 기사를 통해 프랑스 원자력 안전 당국의 이번 조처를 “후쿠시마 사고 이후 나온 가장 급진적인 안전 대책”이라고 평가하며 상세히 그 내용을 소개했다.
프랑스는 58기의 원전에서 전력의 75%를 생산하는 원전 대국이며 원자력 기술과 원자로의 주요 수출국이기도 하다. 일본이 신규 원전 건설을 사실상 중단한 가운데 원전 확대 정책을 펴는 우리나라 원자력 당국에게 역할 모델 구실을 하는 나라도 바로 프랑스이다.
▲프랑스의 원전 위치도. 원전 비중이 75%로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다. 그림=프랑스 원자력안전청.
프랑스 원자력안전청이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전체 원자력 시설의 안전성을 평가해 지난해 12월 발간한 보고서를 <네이처>는 사설에서 “신선하게 솔직하고 전향적”이라고 평가했다.
앙드레-클라우드 라코스트 프랑스 원자력안전청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안전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식은 극한 상황에 시설이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며 “후쿠시마 이전과 이후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원자력 안전당국은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안전철학을 근본적으로 전환했음을 분명히 했다. 다중 안전 장치를 통해 원전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기존 원자력계의 도그마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원자력안전청은 이 보고서에서 중대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기존의 확신을 버리고 예상치 못한 대규모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대책을 마련할 것을 프랑스 원전 운영회사인 프랑스전기(EDF)에게 요구했다.
마샬 조렐 프랑스 방사성 방호 및 핵 안전 연구소 소장은 “프랑스에서 우리가 얘기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하라’는 것”이라고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보고서도 “안전장치가 있지만 정전이나 냉각시스템이 중단되는 최악의 사고가 났을 때 몇 시간 안에 노심용융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원전은 다중방호에 기대는 기존 안전철학에서 중대 사고를 기정사실로 대비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사진=프랑스 원자력안전청.
지진, 홍수 등 자연재해 등 설계기준을 넘는 중대사고가 일어났을 때 피해를 줄이기 위한 핵심시설로 원자력안전청이 제시한 개념이 ‘하드 코어’이다. 주조종실, 비상 발전기, 냉각시스템 등 안전 확보를 위해 핵심적인 시설은 강화된 재료로 보완하고 이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하드 코어는 중대사고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것을 막고 최악의 손실을 경감하려는 목적으로 올해 상반기까지 모든 원전에 설치될 예정이다. 예를 들어, 후쿠시마 사고 때 주 조종실이 방사능에 오염돼 사고 현장을 통제할 운전원의 접근이 어려웠음에 비춰 방사능 누출사고 때에도 조종실로 접근하는 안전한 통로와 조종실 내부의 안전성을 확보하도록 한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하드 코어와 함께 이번 보완책의 핵심은 신속 대응단의 창설이다. 중대한 사고가 났을 때 장비와 기술을 겸비한 조직이 24시간 안에 현장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보완 조처가 연내에 마련된다.
원자력안전청은 이밖에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에서 냉각수가 상실됐을 때에 대비한 보완과 중대사고시 원전 주변의 지하수와 지표수 오염을 막기 위한 조처 등을 사업자에게 요구했다.
국영기업인 프랑스전기는 “원자력안전청의 새로운 보완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 보완책에는 최소 166억 달러가 들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후쿠시마 사고 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모든 원전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에 해당하는 ‘긴급 안전점검’을 한 결과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재 50개 사항에 대한 개선대책을 이행하고 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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