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초파리에서 사랑의 냄새…좀비 세균 전략

조홍섭 2017. 08. 24
조회수 17286 추천수 0
세균 감염 초파리 배설물에 다량의 성호르몬, 몰려든 상대에 퍼뜨려
세균 이용한 새로운 ‘페로몬 함정’으로 병·해충 제거에 이용 기대

Drosophila_melanogaster_-_André Karwath aka.jpg » 초파리에 감염된 세균은 더 많은 감염 상대를 꾀기 위해 성호르몬 분비를 촉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앙드레 카르와트 아카, 위키미디어 코먼스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쥐는 겁을 잃고 고양이 배설물에 이끌려, 결국 이 기생충의 숙주인 고양이를 감염시킨다. 어떤 기생성 편형동물은 달팽이의 눈 자루에 모여든 뒤 마치 이발소 간판처럼 다른 색깔과 무늬를 펼쳐 천적인 새의 눈길을 끈다(아래 동영상)

 

병원체나 기생동물이 이처럼 숙주의 행동과 생리 활동을 조작해 일종의 ‘좀비’로 만드는 사례가 최근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런데 세균이 숙주의 사회적 소통을 조작하는 사실이 초파리 연구에서 밝혀졌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미국 코넬대 연구자들은 치명적 세균에 감염된 초파리가 내는 냄새를 조사했는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연구자의 하나인 마르쿠스 크나덴 막스플랑크연구소 박사는 “초파리에게서 병든 냄새를 감지해 회피하는 신경회로를 발견할 생각이었는데, 대신 건강한 초파리들이 감염된 초파리 냄새를 맡고 곁으로 몰려들었다”며 “병든 초파리가 아주 많은 양의 페로몬(성호르몬)을 방출해 결국 모여든 초파리를 모두 감염시키는 걸 보고 놀랐지만 더 흥미로웠다”라고 막스플랑크연구소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연구자들은 병든 초파리가 내는 냄새가 어떤 화학물질이고 얼마나 많은지 등을 측정했다. 처음 예상처럼 병균에 감염된 초파리가 페로몬을 많이 분비해 짝짓기 기회가 늘어 번식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험 결과 감염 초파리의 세균에 엄청나게 많은 페로몬이 들어 있어 여기 몰려든 초파리를 감염시켰다. 병균이 번성해 초파리에 끼친 피해가 클수록 페로몬 생성량도 늘어났다. 

Anna Schroll.jpg »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초파리 실험 시설 모습. 아나 쉬롤.

페로몬은 사회적 소통 수단이다. 세균은 이런 소통을 늘림으로써 감염 기회도 키울 수 있다.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일수록 더 학질모기에 잘 물리며, 말라리아 원충을 보유한 학질모기일수록 더 자주 흡혈한다는 연구결과가 그런 사례이다. 소통을 통해 말라리아 원충은 감염을 늘린다.

연구자들은 다른 초파리 7종과 황열병을 옮기는 모기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세균 감염이 냄새의 종류를 극적으로 바꾼다는 것을 확인했다. “병균이 사회적 소통을 조작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연계에서 흔한 현상인 것 같다”라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나아가 새로운 ‘페로몬 함정’을 이용해 질병 확산을 막고 농업용 해충을 퇴치할 가능성도 있다. 크나덴은 “곤충에 세균을 감염시킴으로써 페로몬 방출을 늘릴 수 있다. 이를 통해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페로몬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Ian W. Keesey, Sarah Koerte, Mohammed A. Khallaf, Tom Retzke, Aurélien Guillou, Ewald Grosse-Wilde, Nicolas Buchon, Markus Knaden, Bill S. Hansson. Pathogenic bacteria enhance dispersal through alteration of Drosophila social communication. Nature Communications, 2017; 8 (1) DOI: 10.1038/s41467-017-00334-9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뻐꾸기는 개개비 알 개수 세며 탁란한다뻐꾸기는 개개비 알 개수 세며 탁란한다

    조홍섭 | 2020. 07. 01

    둥지에 알 1개 있을 때 노려…비교 대상 없어 제거 회피 여름이 되면 다른 새의 둥지에 슬쩍 자신의 알을 낳아 육아의 부담을 떠넘기려는 뻐꾸기와 그 희생양이 될 개개비 사이의 ‘전쟁’이 시작된다. 세 마리 가운데 한둘은 탁란을 당하는 개개...

  • '흑색선전'으로 포식자 피하는 야생 구피'흑색선전'으로 포식자 피하는 야생 구피

    조홍섭 | 2020. 06. 29

    눈 색깔 검게 바꿔 포식자 주의 끈 뒤 마지막 순간에 도피 수조에서 관상용 열대어인 구피(거피)를 기르는 이라면 종종 구피가 ‘놀란 눈’을 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홍채가 검게 물들어 눈동자와 함께 눈 전체가 검게 보인다. 흔히 물갈이 ...

  • 백악기 거대 악어는 왜 두 발로 걸었나백악기 거대 악어는 왜 두 발로 걸었나

    조홍섭 | 2020. 06. 26

    사천 화석서 육식공룡과 비슷한 악어 확인…“공룡도 진화 초기 두 발 보행” 경남 사천 자혜리에서 발견된 중생대 백악기 원시 악어가 공룡처럼 두 발로 걸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왜 원시 악어가 두 발로 걸었는지 주목된다. 악어는 공룡과 함...

  • 심해 오징어와 혈투? 얕은 바다 상어 배에서 빨판 상처 발견심해 오징어와 혈투? 얕은 바다 상어 배에서 빨판 상처 발견

    조홍섭 | 2020. 06. 24

    큰지느러미흉상어 배에 대왕오징어 빨판 상처…표층 상어의 심해 사냥 드러나 수심 300∼1000m의 심해에 사는 몸길이 13m의 대왕오징어에게는 향고래를 빼면 천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대왕오징어를 노리는 포식자 목록에 대형 상어를 추가해야 할 것으...

  • ‘오후 3시 개화' 희귀식물 대청부채의 비밀‘오후 3시 개화' 희귀식물 대청부채의 비밀

    조홍섭 | 2020. 06. 23

    사촌인 범부채와 교잡 피하려 ‘개화 시간 격리’ 드러나 모든 꽃이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것은 아니다. 잠잘 ‘수(睡)’가 이름에 붙은 수련과, 얼레지 같은 일부 봄꽃은 저녁에 꽃을 오므린다. 반대로 달맞이꽃, 분꽃, 노랑원추리 등은 밤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