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식기 끝난 수사슴, 큰 뿔 왜 달고 다니나

조홍섭 2018. 09. 06
조회수 10062 추천수 1
늑대는 뿔 탈락 수컷 집중 사냥, 죽지 않으려면 힘들어도 유지 
일찍 뿔 뗄수록 다음 번식기 유리…늑대냐 번식이냐 딜레마

e1.jpg » 북아메리카 엘크 수컷이 커다란 뿔을 과시하고 있다. 큰 뿔은 번식뿐 아니라 포식자인 늑대를 막는 무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발정기를 맞은 수사슴은 거대한 뿔을 앞세워 암컷을 차지하려는 싸움을 벌인다. 뿔의 크기는 수사슴의 싸움 능력을 보여주는 정직한 잣대다. 그러나 번식기가 끝난 뒤 거대한 뿔은 무겁고 귀찮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수사슴의 뿔은 이듬해 3월이 되어서야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서 작은 새로운 뿔이 자란다. 왜 사슴은 겨우내 무거운 뿔을 이고 다닐까.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는 복원한 늑대 무리가 8종의 발굽 동물을 사냥한다. 늑대가 가장 선호하는 사냥감은 아시아의 말사슴과 비슷한 북아메리카 엘크이다. 미국 연구자들이 2004∼2016년 동안 늑대가 엘크를 사냥한 기록을 분석했더니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났다. 뿔이 탈락한 수컷 성체가 포함된 엘크 무리는 그렇지 않은 무리보다 늑대에 공격당할 확률이 3.6배나 높았다. 다시 말해 늑대는 뿔을 버린 엘크를 표적으로 삼는다. 수사슴 뿔은 늑대의 공격을 막는 무기인 셈이다.

e2.jpg »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늑대 무리가 외톨이 엘크 수컷을 공격하고 있다. 엘크는 늑대의 단골 표적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그렇다면 왜 엘크 수컷은 이처럼 소중한 뿔을 탈락시키는 걸까. 여기엔 단지 무겁고 번거로운 것을 폐기하는 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뿔을 일찍 탈락시킨 엘크일수록 새 뿔이 먼저 돋아나고 번식기인 가을에 더 큰 뿔로 자란다. 뿔 교체를 서두를수록 번식기의 승자가 될 확률이 커지는 셈이다.

결국 엘크 수컷은 딜레마에 빠진다. 내년 번식기를 위해 뿔을 일찍 버릴 것인가, 아니면 늑대에게 붙잡혀 죽지 않기 위해 뿔을 늦게까지 달고 다닐 것인가. 사슴이 결단을 내리는 건 아니다. 늑대의 포식압이 얼마나 센가에 따라 자연이 그 시기를 결정할 뿐이다.

e3.jpg » 수컷 엘크와 늑대의 관계로 나타낸 일 년. 메츠 외 (2018) ‘네이처 생태 및 진화’ 제공.

연구자들은 “큰 뿔로 인한 혜택이 가장 큰 나이 많고 영양 상태가 좋은 수컷이 가장 일찍 뿔을 버리고 늑대 위험을 감수한다”라고 밝혔다. 짝짓기 가능성이 거의 없는 어린 수컷은 당연히 뿔 탈락 시기가 가장 늦다. 뿔을 일찍 포기한 가장 힘센 수컷이 늑대의 먹이가 된다.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은 무리 가운데 영양 상태가 가장 나쁜 개체부터 포식자의 먹이가 된다는 통념과 어긋난다”며 “과장된 성 선택 무기가 포식자를 물리치는 2차 기능을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라고 밝혔다. 

늑대는 엘크를 겨우내 집중적으로 사냥한다. 엘크가 번식기부터 5달 이상 거추장스러운 뿔을 달고 다니는 이유는 바로 늑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3월이 되면 번식을 위한 결단을 내리게 되고 2∼3달에 걸쳐 뿔을 교체한다.

GettyImages-537867731.jpg » 늑대가 죽인 엘크 사체를 코요테와 까치가 먹고 있다. 겨울철 엘크는 늑대의 집중적인 사냥 대상이다. 게티이미지 뱅크 제공
.
뿔이 엘크의 방어 무기라는 사실은 다른 사슴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무스는 엘크보다 뿔을 다는 기간이 3달 짧은데, 거대한 몸집 자체가 방어 수단이기 때문이다. 순록은 번식기 직후 뿔을 떼어내고 빠른 속도로 늑대가 없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 연구는 4일 과학저널 ‘네이처 생태 및 진화’에 실렸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Matthew C. Metz et al, Predation shapes the evolutionary traits of cervid weapons, Nature ecology & evolution, https://doi.org/10.1038/s41559-018-0657-5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멧돼지도 도구 사용한다-나무껍질로 '삽질'멧돼지도 도구 사용한다-나무껍질로 '삽질'

    조홍섭 | 2019. 10. 17

    번식 둥지 만들 때 코 대신 사용…동료와 새끼에 지식 전파도사람만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생각은 깨진 지 오래다. 침팬지 등 영장류는 물론 까마귀와 일부 물고기도 도구를 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동물 목록에 멧돼지도 오르게 됐다.메레디...

  • 인간 음주의 기원은 발효 과일 먹는 원숭이일까인간 음주의 기원은 발효 과일 먹는 원숭이일까

    조홍섭 | 2019. 10. 16

    거미원숭이 실험 결과, 알코올 선호 맞지만 주요 칼로리 원 못돼과일이 너무 익으면 알코올이 생긴다. 과육의 조직이 무너지면서 효모가 침투해 과일 내부의 탄수화물을 발효시켜 에틸알코올을 만들기 때문이다.과일을 많이 먹는 동물들이 종종 알코...

  • 서·남해 갯벌서 푸른곰팡이 96종 발견서·남해 갯벌서 푸른곰팡이 96종 발견

    조홍섭 | 2019. 10. 15

    신종 후보 17종 포함…차세대 항생제 개발, 치즈 생산 등에 활용꼭 90년 전 알렉산더 플레밍은 깜빡 잊고 뚜껑을 덮지 않은 배지에 날아든 푸른곰팡이가 세균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곰팡이에서 생산한 페니실린 덕분에 제2차 세...

  • 청소 새우가 먹히지 않는 비결 있다청소 새우가 먹히지 않는 비결 있다

    조홍섭 | 2019. 10. 10

    포식자 고객에 청소 직전과 중간에 ‘앞다리 춤’으로 신호열대 태평양 산호초에는 큰 물고기의 아가미와 입속을 청소하는 작은 새우가 산다. 송곳니가 삐죽한 곰치 입속을 예쁜줄무늬꼬마새우가 드나들며 기생충을 잡아먹고 죽은 피부조직을 떼어먹는...

  • 배추흰나비는 실크로드 따라 동아시아 왔다배추흰나비는 실크로드 따라 동아시아 왔다

    조홍섭 | 2019. 10. 08

    전 세계 유전자 분석 결과…지중해 기원, 통일신라 때 작물과 함께 와배추흰나비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분포하고 수도 많은 나비의 하나다. 생물 종으로 성공한 나비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농작물 피해를 일으키는 해충이기도 하다.시민 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