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귀지’에 세계사가 기록됐다?

조홍섭 2018. 11. 26
조회수 9171 추천수 1
60년대 포경 절정 때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 급증, 2차대전 때도 증가
2000년대 이후 다시 치솟아, 기후변화 인한 바닷물 온도 상승 탓 추정

e1.jpg » 고래의 귀지는 구하기 힘든 고래의 생활사와 지구 환경변화에 관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귀지 연구 대상의 하나인 혹등고래 모습. 미국 해양대기국(NOAA) 제공.

물고기의 머릿속에는 귀돌(이석)이라는 작은 평형기관이 있다. 그 안에는 나이테처럼 물고기가 살던 환경과 물고기의 정보가 켜켜이 담겨있다. 고래의 머리에도 생활사를 더듬어 볼 단서가 숨어 있다. 물고기가 아니어서 귀돌은 없지만, 대신 거대한 귀지가 그 구실을 한다.

대형 수염고래는 여름 동안 극지방에서 폭식한 뒤 나머지 반년은 더운 바다에서 새끼를 기르며 단식한다. 이런 6개월 주기의 생활사 흔적은 귀의 분비물이 굳은 귀지에 진하고 옅은 나이테로 남는다.

e2.jpg » 참고래의 귀지. 분비물이 나이테처럼 쌓여 돌처럼 굳는다. 트럼블 교수 제공.

장수하는 고래의 귀지를 분석하면 좀처럼 자료를 구하기 힘든 고래의 생활사와 당시의 환경 변화를 알 수 있다는 획기적인 연구가 나온 것은 2013년이었다. 미국 베일러대 스티픈 트럼블 교수와 사차 우센코 교수팀은 선박과 충돌해 죽은 12살짜리 21m 길이의 수컷 대왕고래로부터 25㎝ 길이의 염소 뿔처럼 생긴 귀지를 확보해 분석했다.

당시 과학저널 ‘미 국립학술원회보’에 실린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이 고래의 귀지에 포함된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급증한 것으로부터 이 고래의 성 성숙 시기가 10살께인 사실을 알아냈다. 또 분해가 힘든 농약과 방염제 성분이 태어난 첫 한 해 동안 귀지에 다량 포함돼 있어, 어미 고래의 모유로부터 난분해성 유기화합물질이 새끼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e3.jpg » 대왕고래 귀지의 위치와 모습. (A) 외이도에 있는 귀지(d) (B) 25.4㎝에 이르는 대왕고래 귀지의 모습 (C) 길이 방향의 단면 (D) 귀지를 확대한 모습. 나이테처럼 켜가 보인다. 트럼블 외 (2013) PNAS 제공.

연구자들은 이 연구를 확장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가 포경 실적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 알아봤다. 귀지의 주인도 대왕고래를 비롯해 참고래, 혹등고래 등 3종 20마리로 넓혔다. 이들 고래가 태어난 해는 1871년부터 2013년까지여서, 귀지로부터 15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바다에서 벌어진 상업 포경,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바다 환경, 기후 변화로 인한 수온 상승 등이 고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트럼블 교수는 “이 연구는 수염고래의 스트레스 수준이 시기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지 정량적으로 보여주는 첫 시도”라며 “약 150년 동안 고래가 생존하기 위해 겪은 다양한 스트레스, 곧 포경, 선박 소음, 선박 충돌 위험, 지속적인 괴롭힘이 어떻게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를 상승시켰는지 보여준다”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e4.jpg » 포경 강도와 귀지 속 코르티솔 농도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래프. 트럼블 외 (2018)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제공.

코르티솔 분비와 포경 실적을 비교한 그래프는 둘이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깔끔하게 보여준다. 포경이 늘어나면 고래의 스트레스 호르몬 수준도 비슷하게 높아졌다. 1960년대 상업 포경이 최고조에 이르러 15만 마리가 잡혔을 때 고래의 스트레스 호르몬도 최고조로 치솟았다. 대형 수염고래에 대한 포경이 중단된 1970년대에 호르몬 수준도 최저치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래프를 보면, 두 지표 사이에 몇 군데 불일치가 드러난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상업 포경은 최소 수준으로 떨어지지만 코르티솔 수준은 오히려 10% 늘어났다. 이에 대해 우셍코 교수는 “상업 포경이 주던 스트레스를 전쟁이 대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중 폭발, 선박과 비행기와 잠수함이 동원된 바다 전투, 선박 운항 증가 등이 포경이 줄었음에도 고래의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를 늘렸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불일치는 포경 금지 이후 나타났다. 자신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추격하는 포경선이 사라졌는데도 고래의 스트레스는 처음에는 서서히 늘어나다 최근 들어서는 가파르게 증가해 1960년대 포경 전성기 수준에 육박했다. 

그 이유가 무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선박 등이 일으키는 해양 소음과 누적된 중금속과 유기화합물질 오염,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온 상승 등 사람과 관련된 요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일단 1970∼2016년 동안 바다 표면 수온이 높아질수록 고래의 코르티솔 분비가 늘어난 상관 관계는 이번 연구에서 입증됐다. 우센코 교수는 “만성 스트레스는 번식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고래에서 귀지를 확보하는 과정 등을 소개하는 연구진 유튜브 영상.

한 가지 다행이라면, 무엇이든 간직하는 자연사박물관의 속성 덕분에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과 런던 자연사박물관 등에 고래의 귀지가 수천 점 보관돼 있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은 이미 확보한 100여 점의 고래 귀지를 이용해 고래의 생식 활동, 먹이 종류 등 고래 생활사와 지구 환경 변화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번 연구는 과학저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최근호에 실렸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Stephen J. Trumble et al, Baleen whale cortisol levels reveal a physiological response to 20th century whaling, Nature Communications (2018) 9:4587, DOI: 10.1038/s41467-018-07044-w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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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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