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아리와 범고래가 만나면 물범이 ‘웃는다’

조홍섭 2019. 04. 22
조회수 27109 추천수 0
최상위 포식자는 범고래, 최대 혜택은 백상아리 먹이 물범

o1.jpg » 범고래는 집단 사냥에 능하고 덩치도 커 바다 생태계에서 백상아리를 제치고 최고 포식자 자리를 차지한다. 로버트 피트먼, 미 국립해양대기국(NOAA) 제공.

자연다큐멘터리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리는 백상아리와 범고래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모두 바다의 대표적인 포식자이지만, 백상아리가 무서운 폭군 이미지라면 범고래는 종종 영리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장기간의 현장 연구 결과를 보면, 바다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 자리는 범고래에 넘겨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백상아리는 범고래의 모습만 비쳐도 혼비백산 그 해역을 오랫동안 떠날 정도로 공포에 떠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위험 효과’는 생태계 먹이사슬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살바도르 조르겐센 미국 몬테레이 만 수족관 박사 등 미국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트’ 16일 치에 실린 논문에서 백상아리와 그 주 먹이인 코끼리물범, 그리고 범고래를 수십 년 동안 장기 연구해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캘리포니아의 대 패럴론스 국립 해양보호구역에서 2006∼2013년 동안 백상아리 165마리에 무선추적장치를 부착해 추적했고, 27년 동안 범고래와 물범을 관찰했다.

o2.jpg » 범고래(회색), 백상아리(초록색), 코끼리물범*보라색) 서식지(D). 왼쪽은 패럴론 섬에 각각이 찾아오는 시기. A 물범, B 백상아리, C 범고래. 조르겐센 외 (2019) ‘사이언티픽 리포트’ 제공.

두 해양포식자가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고, 그것을 관찰할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조사 해역에선 매년 봄과 가을 코끼리물범이 패럴론 섬에서 새끼를 낳는데, 회피능력이 떨어지는 어린 물범을 사냥하기 위해 범고래는 봄과 가을, 백상아리는 가을에 섬을 찾는다. 두 바다 포식자는 매년 가을 조우할 가능성이 있다.

연구에 참여한 백상아리 전문가인 스콧 앤더슨은 1997년 10월 그런 드문 광경을 목격하는 행운을 안았다. 그는 “고래 관광선을 타고 있었는데 무선 연락을 받고 현장에 다가가 보니 범고래가 백상아리를 죽여 간을 뜯어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며 “범고래 두 마리가 머리를 물 밖에 내밀고 킥킥 소리를 낸 뒤 물속으로 사라졌는데, 이는 먹이 사냥에 성공했을 때 내는 소리”라고 몬테레이 만 수족관이 누리집에 올린 글 ’거인의 충돌: 백상아리 대 범고래’에서 밝혔다.

무선추적을 시작한 이후에도 이런 만남을 3차례 더 확인했다. 2009년 11월 범고래 무리가 3곳에서 따로 물범을 사냥했다. 당시 바다에는 17마리의 무선추적장치를 단 백상아리가 있었다.

o3.jpg » 백상아리는 강력한 해양 포식자이지만 범고래와 맞닥뜨리면 피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런 위험 회피는 생태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범고래는 2시간 반 동안 바다에서 사냥했는데, 이를 본 백상아리는 몇 시간 안에 모두 자취를 감췄다. 연구자들은 “태그를 단 백상아리가 모두 살아있었지만 범고래가 다른 백상아리를 잡아먹었거나 공격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조르겐센 박사는 “범고래를 만나면 백상아리는 자신이 선호하는 사냥터를 즉각 떠나 최고 1년 동안 다시는 그곳에 돌아오지 않는다. 범고래가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그렇다”고 수족관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도피한 백상아리는 다른 바다의 코끼리물범 사냥터로 갔음이 확인됐다.

패럴론 섬을 찾는 백상아리는 길이가 5.5m에 이르는 대형 상어이다. 범고래는 길이가 6∼8m로 더 크고 지능이 높으며, 무리를 지어 소리로 소통하면서 사냥전략을 편다. 조르겐센 박사는 “범고래가 백상아리를 먹이로 사냥하는지 아니면 경쟁자로서 겁을 주어 쫓아내는지는 불확실하다”며 “그러나 1997년 사례에서 보듯이 백상아리에 1t이 넘는 영양덩어리인 간이 들어있다는 것을 범고래가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o3-1.jpg » 평균적인 범고래(위)와 백상아리의 크기 비교.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한편, 범고래의 출현으로 가장 크게 덕을 보는 동물은 백상아리의 주식인 코끼리물범으로 나타났다. 앤더슨은 “남동 패럴론 섬에서 한 번식철에 약 40마리의 물범을 백상아리가 잡아먹는데, 범고래가 모습을 드러낸 뒤로 물범이 죽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범고래가 출현하면 백상아리에 의한 물범의 포식률은 4∼7배 작아진다고 논문은 밝혔다.

포식자는 직접 잡아먹는 방식으로만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먹이 동물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활동을 축소하고 서식지를 바꾸는 식으로 대응하고, 이것이 생태계에 연쇄효과를 일으킨다.

o4.jpg » 캘리포니아의 코끼리물범 대규모 번식지. 범고래가 찾아와 한 두 마리가 희생되면 몇 달 동안 주요 포식자인 백상아리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범고래에 놀란 백상아리는 이미 다른 상어가 있는 덜 선호하는 비좁은 사냥터로 이동할 수밖에 없고, 이는 100∼3000㎞의 장거리 이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해야 하는 백상아리에게는 부정적 영향을 준다.

조르겐센은 “우리는 보통 대형 포식자의 사냥이 바다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알아볼 때 공포와 위험 회피가 중요한 구실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번 연구로 공포 효과가 백상아리 같은 대형 포식자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끼쳐 덜 선호하지만, 더 안전한 사냥터로 방향을 틀게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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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Salvador J. Jorgensen et al, Killer whales redistribute white shark foraging pressure on seals, Scientific Reports (2019) 9:6153, https://doi.org/10.1038/s41598-019-39356-2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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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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