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폭군’ 얼룩무늬물범은 왜 협동 사냥에 나섰나

조홍섭 2019. 08. 16
조회수 20702 추천수 1
먹이도, 경쟁자도 많을 때 서로 돕는 게 이득…평소와 달리 공존 추구

s1.jpg » 펭귄을 사냥하는 얼룩무늬물범. 남극의 대표적 펭귄 사냥꾼이지만 외딴 빙산에 서식해 생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제임스 로빈스, 플리머스대 제공.

남극의 ‘순둥이’ 웨델물범이 펭귄을 사냥하는 모습이 최근 화제가 됐지만, 이번에는 남극의 ‘폭군’으로 알려진 얼룩무늬물범(표범물범) 두 마리가 사이좋게 사냥하고 먹이를 나누는 모습이 처음으로 촬영됐다.

지난 4월 공개된 넷플릭스의 새 다큐멘터리 ‘우리의 지구’(Our Planet) 촬영팀은 남극해의 사우스조지아 섬에서 드론을 띄워 촬영하다 특별한 광경을 목격했다. 얼룩무늬물범 36마리가 임금펭귄 집단서식지에서 사냥하고 있었는데, 사냥 행동이 평소와 달랐다.

이 물범 두 마리가 먹이 주변에서 만나면 상대를 거칠게 쫓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들은 한 물범이 사냥한 펭귄을 물고 있으면 다른 펭귄이 살점을 잡아 뜯는 식으로 서로 도와가며 사냥감을 처리했다. 제임스 로빈스 영국 플리머스대 동물학자 등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극지 생물학’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이번 관찰을 분석했다.

s4.jpg » 눈밭 위에서 쉬는 얼룸무늬물범. 범고래를 빼고는 남극 최고 포식자로 군림한다. 앤드루 시바,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로빈스는 “얼룩무늬물범은 영화 ‘해피 피트’에서 귀여운 펭귄을 쫓아다니며 못살게 구는 역할처럼 남극을 혼란에 빠뜨리는 악당으로 종종 그려진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의 동물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라며 “이번 촬영은 남극의 외딴곳에서 종종 접근하기 힘든 빙산에 홀로 있는 이 물범의 행동과 삶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준다”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얼룩무늬물범은 남극에서 범고래 빼고는 두려워할 상대가 없는 최상위 포식자로서 다른 물범, 바닷새, 문어, 크릴 등을 잡아먹는다. 특히 헤엄치는 펭귄을 낚아채 바다 표면에서 패대기쳐 먹는 펭귄 사냥꾼으로 유명하다. 대담하고 힘이 세며 호기심이 많아 다이버 등 사람에게도 위협적이다.

s2.jpg » 얼룩무늬물범 한 마리가 사냥한 임금펭귄을 고정하면 다른 한 마리가 뜯어먹는 공조 행동을 묘사한 그림. 카이 해그버그, 제임스 로빈스 외 (2019) ‘극지 연구’ 제공.

촬영팀이 발견한 얼룩무늬물범의 사냥터는 황제펭귄 다음으로 커 키가 1m에 이르는 임금펭귄 서식지였다. 많은 물범이 수많은 펭귄 속에서 사냥하는 와중에 이런 행동이 목격됐다.

연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사냥감을 지키기 위해 경쟁자를 쫓아내느라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는 먹이 도둑질을 용인하면서 일부나마 먹는 쪽이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이제까지 얼룩무늬물범이 주로 사냥한 것은 소형 펭귄이었지만, 이번에는 대형 펭귄이란 점도 특이하다.

큰 먹이를 사냥한다면 경쟁자와 나눠 먹을 여지도 커진다. 해양 포유류의 독특한 해부구조도 이와 관련 있다. 육상 포식자와 달리 해양 포유류는 자르는 이가 없다. 가라앉기 전에 먹이를 통째로 삼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얼룩무늬물범은 강력한 앞니와 길이 2.5㎝의 송곳니로 먹이를 붙잡고 거칠게 흔들고 후려쳐 뜯겨 나온 고기를 삼킨다.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동작이다.

s3.jpg » 얼룩무늬물범의 이와 턱. 강력한 앞니와 길이 2.5㎝의 송곳니로 먹이를 물어 수면에 내리쳐 조각내 먹는다. 크릴 등 작은 먹이는 어금니 뒤의 이(오른쪽) 사이로 물을 흘려 걸러 먹는다. 제임스 로빈스 외 (2019) ‘극지 연구’ 제공.

만일 다른 물범이 사냥감을 물어 고정해 준다면 고기를 떼어내기가 훨씬 쉬워진다. 이런 협동의 결과 먹이를 모조리 잃는 게 아니라 일정 부분 얻을 수 있다면 먹이를 훔치려는 경쟁자를 허용하더라도 큰 손해는 아니다. 연구자들은 “이들의 행동이 진정한 협동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먹이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범고래 같은 사회성 동물은 협동 사냥을 하지만 혈연관계로 연결돼 있다. 연구자들은 “협동 사냥을 하는 물범들이 어떤 관계인지 밝히는 것이 후속연구 과제”라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또 “이번 관찰이 협동 사냥으로 밝혀진다면 과거 얼룩무늬물범과 다이버와의 특별한 만남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가 폴 니클렌은 2012년 잠수하다 얼룩무늬물범이 살아있는, 다친, 그리고 죽은 펭귄을 잇달아 자신에게 가져오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당시 이 행동은 ‘선물 주기’로 받아들였지만, 물범이 자기가 잡은 사냥감의 ‘협동 처리’를 다이버에게 요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얼룩무늬물범의 임금펭귄 협동 사냥 유튜브 동영상


한편, 얼룩무늬물범과 달리 이도 뭉툭하고 동작이 느리며 주로 얼음 밑에서 물고기나 오징어를 잡아먹는 웨델물범이 남극 인익스프레시블섬에서 아델리펭귄을 잡아먹는 모습을 지난 2월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던 임완호 감독이 목격한 일이 있다.

이원영 극지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최근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웨델물범의 펭귄 사냥은 매우 드문 일이며 이제껏 영상으로 기록된 적이 없다”며 처음 헤엄을 치기 시작한 새끼 펭귄을 손쉽게 잡을 수 있어 별식으로 먹었을 가능성과 주 먹이인 이빨고기가 남획으로 줄어들어 생긴 특이 행동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분명한 것은, 두 물범의 사례 모두 우리가 바다 포유류의 생태에 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James R. Robbins et al, A rare observation of group prey processing in wild leopard seals(Hydrurga leptonyx), Polar Biology, https://doi.org/10.1007/s00300-019-02542-z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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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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