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벌이 꽃을 피운다?

조홍섭 2020.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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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영벌이 잎에 5∼10개 상처내자 개화 일러져…‘원예가 꿈’ 이뤄지나


bu1.jpg » 서양뒤영벌 일벌이 꽃이 피지 않은 식물의 잎에 상처를 내고 있다. 손상을 입은 식물은 개화 시기를 앞당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니에르 풀리도, 드모라에스 앤 메셔 연구실 제공.

벌과 꽃을 피우는 식물이 가루받이를 통해 이룩한 공생관계는 든든한 것 같지만, 자칫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이른봄 뒤영벌이 겨울잠에서 깨어났는데 꽃이 피지 않아 먹을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뒤영벌은 이런 사태를 능동적으로 극복하는 이제껏 알려지지 않는 행동을 한다. 꽃이 피지 않은 식물 잎에 상처를 내 개화 시기를 최고 한 달까지 앞당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포테이니 파살리두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 생물학자 등은 22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을 통해 “뒤영벌이 식물에 의도적인 손상을 줘 꽃이 피는 시기를 현저히 앞당긴다는 사실을 실험과 현장 연구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뒤영벌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직후 여왕벌이 알을 낳아 집단을 키운다. 꽃가루는 뒤영벌 애벌레의 유일한 식량이자 성체의 주요한 단백질원이기 때문에 이때 꽃가루가 공급되지 않는다면 벌 집단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bu2.jpg » 꽃가루를 얻지 못한 뒤영벌이 가지 잎에 남긴 손상 모습. 파살리두 외 (2020) ‘사이언스’ 제공.

연구자들은 이런 불일치가 굶주린 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꽃이 피지 않은 양배추, 흑겨자, 토마토, 가지를 심은 곳에 풀어놓았더니 벌들이 잎에 앉아 뾰족한 입으로 구멍을 뚫은 뒤 가위 같은 턱으로 잘라냈다. 몇 초 만에 잎에는 쐐기 모양의 상처가 났지만, 벌이 수액을 핥거나 자른 잎 조각을 둥지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이어 실험실에서 정밀하게 이뤄진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굶주린 뒤영벌이 잎에 5∼10개의 상처를 낸 토마토는 손상을 입지 않은 토마토보다 30일이나 일찍 꽃이 피웠다. 흑겨자도 개화가 16일 당겨졌다.


혹시 좁은 실험실이어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자들은 야외실험을 했지만, 꽃가루가 부족할수록 벌이 식물에 상처를 많이 내고 주변에 꽃이 늘어나면 상처를 덜 내는 현상이 그대로 나타났다. 3일만 꽃가루를 주지 않아도 꽃이 안 핀 식물에 내는 상처가 늘었고, 연구에 쓰이지 않은 다른 야생 뒤영벌 2종도 상처 내는 일에 가담했다.


bu3.jpg » 식물에 상처를 내는 서양뒤영벌들. 뒤영벌은 공간 감각과 인지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이런 행동이 개화를 앞당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개별적인 벌의 능력이 아니라 오랜 진화적 적응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한니에르 풀리도, 드모라에스 앤 메셔 연구실 제공.

식물은 초식동물의 공격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꽃을 일찍 피우기도 한다. 죽기 전에 번식을 서두르는 전략이다. 뒤영벌이 낸 상처도 이런 자극을 주었을까.


연구자들은 면도칼 등을 이용해 뒤영벌이 낸 것과 비슷한 상처를 식물에 내고 개화가 일러지는지 보았다. 개화 시기가 흑겨자는 8일 토마토는 25일 당겨졌다. 효과는 나타났지만, 벌이 낸 것에는 못 미쳤다.


연구자들은 “벌이 낸 상처가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식물의 개화를 촉진하는지는 이번 연구로 알 수 없었다”며 “인위적인 상처만으로는 벌과 같은 효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보아 벌이 (화학물질 주입 같은) 추가 단서를 식물에 제공하는 것 같다”고 논문에 적었다.


bu4.jpg » 뒤영벌은 안쪽으로 접근하기 힘든 형태의 꽃 중간에 구멍을 뚫고 꽃꿀을 ’훔치는’ 습성이 있다. 식물에 상처는 내는 행동은 이런 습성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이번 연구는 기후변화로 인해 개화와 가루받이 매개곤충의 활동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를 완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겨울잠을 자는 뒤영벌은 활동을 개시하는 데 온도가 중요해 기후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꽃은 주로 낮의 길이에 따라 개화 시기를 정해 기후변화 영향을 덜 받는다. 기후변화가 진전하면서 불일치가 심해질 수 있다.


라르스 치트카 영국 런던 퀸메리대 생물학자는 ‘사이언스’에 실린 이 논문에 대한 논평에서 “뒤영벌은 저비용 고효율의 속임수로 개화기를 앞당기는 데 성공했다”며 “이런 행동은 앞으로 닥칠 기후변화 대응에 유연성과 회복 탄력성을 늘려 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뒤영벌이 식물체에 화학물질을 주입하고 또 그 물질이 무언지 밝혀진다면 화훼식물의 개화기를 한 달이나 앞당기는 원예가의 꿈이 이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인용 저널: Science, DOI: 10.1126/science.aay0496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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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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