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에 먹힐까 더위에 쓰러질까, 초식동물 딜레마

조홍섭 2020. 08. 26
조회수 15511 추천수 0

포식자 피해 한낮 먹이활동…기후변화로 열사병 위험 커져


pr1.jpg » 얼룩말을 사냥하는 사자. 사바나의 초식동물은 먹이와 물을 찾고 포식자와 열기를 피하면서 힘든 균형을 유지한다. 기후변화는 이 균형을 깨뜨릴 우려를 낳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얼룩말 같은 초식동물은 사자가 사냥하는 때를 피해 풀을 뜯는 시간대를 뜨거운 한낮으로 옮기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사바나의 초식동물은 기후변화로 더욱 취약해질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미힐 벨뒤스 네덜란드 라이던대 교수 등 국제 연구진은 남아프리카의 야생동물 보호구역 32곳에서 2013∼2017년 동안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확보한 자료를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과학저널 ‘네이처 생태학 및 진화’ 8월호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아프리카 사바나의 낮은 덥다. 많은 동물이 더위를 피해 밤에 활동한다. 벨뒤스 교수는 “현장조사를 하다 보면 밤에는 낮에 볼 수 없던 동물이 많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며 “특히 낮 동안 볼 수 없는 코끼리, 코뿔소, 물소 같은 대형 동물과 맞부닥치는 일이 많다”고 ‘네이처 연구 공동체’ 블로그에서 밝혔다.


왜 낮에는 작은 초식동물이 활동하고 밤이 될수록 큰 초식동물이 돌아다닐까? 연구진이 이런 궁금증을 풀 수 있었던 건 남아프리카 사자의 비극 덕분이었다.


남아프리카 32개 보호구역의 사자는 가축을 해치는 ‘해로운 동물’로 간주해 마구 사냥한 끝에 1950년대 중반까지 모두 사라졌다. 이후 보호구역 절반에서 사자를 재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사자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초식동물의 행동이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할 절호의 ‘자연 실험장’이 마련됐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pr2.jpg » 무인카메라에 찍힌 하마. 대형 초식동물이어서 사자가 활동하는 이른 새벽 선선할 때 풀을 뜯으러 나왔다. 요리스 크롬시흐트 제공.

무인카메라에 찍힌 동물과 활동 시간대를 분석한 결과 사자가 없는 곳의 초식동물은 사자가 있는 곳에 견줘 더 서늘한 시간대에 먹이활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행동은 초식동물의 크기에 따라 달라졌다.


코끼리와 코뿔소 등 몸무게 700㎏ 이상인 대형 초식동물은 사자가 주변에 있는지에 거의 영향받지 않고 선선한 밤에 먹이를 먹었다. 잡아먹힐 걱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40㎏이 안 되는 사바나토끼 같은 소형동물도 애초 사자의 주요 먹잇감이 아니어서 영향권 밖이었다.


pr3.jpg » 대형 영양 겜스복은 사자가 없다면 시원한 새벽이나 어스름에 먹이활동을 하지만 사자가 나타나면 한낮으로 시간대를 옮긴다. 찰스 샤프,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사자로 인해 가장 큰 행동변화가 일어난 동물은 몸무게 100∼550㎏의 중형 초식동물이었다. 대형 영양인 겜스복, 얼룩말, 검은꼬리누 등은 사자가 나타나자 먹이활동 시간을 새벽이나 어스름에서 한낮으로 옮겼다.


중형 초식동물은 사자의 주식이다. 사자는 더위를 피해 주로 새벽이나 어스름에 이들을 사냥한다. 사자를 피해 한낮으로 먹이활동 시간을 옮기면 체온상승으로 인한 열사병 가능성도 커진다. 게다가 아프리카 사바나는 지구 다른 지역보다 지구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곳이다.


연구에 참여한 요리스 크롬시흐트 교수는 “모든 초식동물이 같은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겜스복은 열과 사자를 모두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얼룩말 같은 동물은 고온이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pr4.jpg » 중형 초식동물인 검은꼬리누. 기후변화의 영향이 우려되는 동물의 하나다. 무하마드 마디 카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기후변화에 대응해 동물은 몸을 바꾸어 적응하는 것보다 행동을 바꾸는 것이 단기적으로 쉽다. 더 시원한 곳으로 서식지를 옮기거나 활동 시간대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장벽이나 서식지 훼손이 이동을 힘들게 하고, 결국 사바나 초식동물의 멸종을 가속할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지적했다.


벨뒤스 교수는 “기후변화와 함께 초식동물이 열과 포식자를 모두 피할 수 있는 ‘시간의 창’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며 “이번 연구는 기후변화가 개별 종뿐 아니라 종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인용 저널: Nature Ecology & Evolution, DOI: 10.1038/s41559-020-1218-2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물고기도 체온 올려 바이러스와 싸운다물고기도 체온 올려 바이러스와 싸운다

    조홍섭 | 2020. 09. 25

    잉어 등 감염되면 수온 높은 곳 이동해 ‘자가 치료바이러스나 세균에 감염되면 사람은 체온을 올려 면역반응을 강화하고 침입한 병원체를 억제하려 한다. 그러나 발열은 항온동물인 포유류뿐 아니라 변온동물에서도 발견된다.파충류인 사막 이구아나가...

  • 가을철 조개 안에 알 낳는 담수어 납지리의 비밀가을철 조개 안에 알 낳는 담수어 납지리의 비밀

    조홍섭 | 2020. 09. 23

    경쟁 피해 10월 산란, 조개 속 휴면 뒤 4월 나와납자루아과 물고기는 살아있는 조개껍데기 속에 알을 낳는 특이한 번식전략을 구사한다. 알에서 깬 새끼가 헤엄칠 만큼 충분히 자란 뒤 조개를 빠져나오기 때문에 적은 수의 알을 낳고도 번식 성...

  • 쓸모없다고? 코끼리 사회에서 늙은 수컷도 중요하다쓸모없다고? 코끼리 사회에서 늙은 수컷도 중요하다

    조홍섭 | 2020. 09. 22

    젊은 수컷에 역경 이길 지식과 경험 제공…‘불필요하다’며 트로피사냥, 밀렵 대상나이 든 아프리카코끼리 암컷의 생태적 지식과 경험이 무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늙은 수컷 또한 암컷 못지않게 코끼리 사회에서 ...

  • 얼어붙은 설원의 다람쥐, ‘도토리 점심’만 먹을까?얼어붙은 설원의 다람쥐, ‘도토리 점심’만 먹을까?

    조홍섭 | 2020. 09. 18

    캐나다 북극토끼 사체 청소동물 24종, 4종의 다람쥐 포함 캐나다 북서부 유콘 준주의 방대한 침엽수림에서 눈덧신토끼는 스라소니 등 포식자들에게 일종의 기본 식량이다. 눈에 빠지지 않도록 덧신을 신은 것처럼 두툼한 발을 지닌 이 토끼는 ...

  • ‘노래하는 고대 개' 뉴기니서 야생종 발견‘노래하는 고대 개' 뉴기니서 야생종 발견

    조홍섭 | 2020. 09. 17

    `늑대+고래’ 독특한 울음 특징…4천m 고원지대 서식, ‘멸종’ 50년 만에 확인오래전부터 호주 북쪽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 뉴기니에는 독특한 울음소리의 야생 개가 살았다. 얼핏 늑대의 긴 울음 같지만 훨씬 음색이 풍부하고 듣기 좋아 ‘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