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서편에 지는 달님

조회수 13055 추천수 0 2013.04.17 00:04:51

(서편에 지는 달님)

 

  moon.jpg

 

동창에 겹으로 서린 이슬이라도 바깥의 정경을 마저 다-아 가리진 못한다. 하루 중 가장 차갑단 새벽, 미처 성애가 되지 못한 이슬방울들, 말끔하게 닦이고 빠끔히 말라있는 곳, 맑은 유리를 건너고 뿌연 하늘 바탕에 밤나무가지 거무스름한 그린 자취도 건너면 영롱한 별님 꼭 하나가 창문을 밤새 지켜주고 있었다. 샛별이다.

 

부스스, 마-악 잠에서 깨어난 내 모습이 부끄럽고 머쓱해 윗몸을 일으키면 괴괴한 달빛 한줄기 서재 바닥에 널려있는 새벽의 이불 위로 켜켜이 내리고, 희고 어두운 줄무늬 바탕 이불에 경계는 더욱 또렷해진다. 곧게 뻗어있는 두 다리의 형상을 타고 골 깊은 그림자는 미진한 나머지 마른 골짜기의 꿈을 마저 그려낸다.

분명한 달빛인데도 햇살인 듯 잠시 착각이 인다. 밤과 낮이란 시간개념이 의미를 깡그리 잃은 것, 공간만 남아있고 이제 시간일랑 일시 정지된 덕분에 내면으로 향하는 뜻은 상념보다 감상의 깊이가 먼저 앞장서기 마련이리라.

이런 날 이런 밤 우윳빛 하얀 달님의 따사로움은 방바닥보다 되레 온화하다. 내외의 포근함이 역전되는 바싹 마른 봄밤의 짙은 고요, 막상 새벽의 북창 너머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면 동천의 달님 그는 눈부신 은빛, 심하다.

가까운 모든 사위는 얼마든지 밝음의 은혜 안에 푸욱 젖어들고 대부분의 먼 누리는 정적과 평안 속에 깊숙이 잠겨있다. 잠들어있다. 눈이 천천히 옮기고 닿는 곳마다 온화한 봄색은 부드럽기로 한결같다.

달빛으로 흠뻑 젖어드는 마른 대기 아무 곳이라도 한 귀퉁이 손으로 꼭 쥐면 뽀얗고 매끄러운 즙액 한줄기 또르르 빠져나올라, 눈과 맘이 닫는 곳마다 혹시나 모르고 가해질 기운이 있으랴, 여분의 힘과 기운일랑 모두 느슨하게 풀어줘야 한다.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모두 잠들어있는 참누리에 똑똑하게 깨어있는 별님과 달님, 하필 어둠도 다행한 세상, 모두가 잠결에든 누리를 이처럼 하염없이 밝게 비추일 건 뭣이며, 그 한 귀퉁이에 나 또한 깨어있다. 별님 하나, 달님 하나를 이유로 앞세워도 순전히 깊은 봄밤 그 탓임을 안다. 미간에서 코허리를 타고 허전함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면 난 금세 안다. 이미 멀리 달아난 잠결인지라 소용을 찾은 눈, 하지만 띄운 눈꺼풀도 지금은 기운이라고 저절로 내리 감긴다. 먼지 한 톨 오가는 기색조차 억제된 지극한 정적 속에서 침잠의 은혜를 아낌없이 쏟아 부어주며 우윳빛으로 한껏 넘쳐나는 연한 공간의 먹먹함에 취하고 싶어서 취하는 게 아니다.

 

양다리를 사광으로 한없이 그윽하게 비춰지던 줄무늬 한쪽에 그늘도 어슷해진다함은 서편 높직한 산등성이를 은월은 기어코 넘어간단 뜻, 또 돌아보면 말끔하던 달님의 은색 표면에 멀리 소나무 그림자가 그물망처럼 길게 자취를 새기고 있다. 보니 그저 무념무색일 뿐 남는 아쉬움이란 있는 듯 없는 듯.

짙고 무성한 솔가지에 걸려 한동안 덜컥거리던 달님이 움직임을 되찾음에 능선 아래로 사라짐은 빠르다. 어김없는 때는 아침으로 가까워가지만, 덕분에 밝은 한밤중으로부터 어둔 새벽으로 골짜기와 서재는 오히려 크게 뒷걸음친다.

달님이 동산을 온전히 넘자 사위에 어둠은 코끝이 멀도록 몇 곱으로 깊어지고, 의지와 상념은 내 안으로 방향을 찾아 맑아진 난 비로소 기댔던 어깨를 일으켜 세운다.

긴 호흡이 부지불식간에 토해지면 재깍하는 느낌과 함께 멈췄던 시간도 흐름을 되찾고, 딸깍 삼파장 탁상 등이 적막과 어둠을 단숨에 밀어내면 양은주전자에 찻물 한잔 먼저 올리고 컴퓨터 스위치도 찾아 넣고….

흐르고 닿는 대로 만사가 온통 지당할 뿐, 묘사야 되거나 말거나 뭣을 생각하고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도 생각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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