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화학물질,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해결한다
집안에 가전제품 쌓아두고도 반도체 산재 무관심 놀라워
노동자 작업환경이 상품의 위해성을 막아 내는 방파제

삼성전자와 반도체의 직업병이 사회문제가 된 지 10년 만인 2017년, 마침내 ‘삼성 직업병’이 법적으로 폭넓게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간 삼성 직업병으로 혈액암, 뇌종양, 유방암만 인정되었으나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까지도 산업재해(산재)로 확인되었고(■ 관련 기사: 산재를 산재라 부르는 데 10년이 걸렸다), 생산공정에서 일한 적이 없는 협력업체 관리자가 삼성반도체로 인해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도 인정되었다(■ 관련 기사: 법원, 삼성반도체 협력업체 관리자 백혈병도 산재 첫 인정). 또한 삼성반도체에 이어 삼성디스플레이에서도 산재로 백혈병이 발생한 것이 확인되면서 ‘삼성 직업병’이라 불리는 전자, 반도체 산업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직업병이 법적으로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관련 기사: 삼성 반도체 이어 ‘LCD 공장’ 백혈병도 산재 첫 인정). 반도체 산업의 산재는 비단 삼성계열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엘지 디스플레이에서도, 에스케이 하이닉스에서도 또 그 협력업체에서도 작업장 유해물질로 인한 산재 피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07년 황유미 씨의 사망으로 세상에 알려진 삼성 백혈병 문제가 10년이 지나고,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협상 조정위원회(조정위)’가 구성된 지도 4년이 지났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반도체 산업으로 인한 산재 사고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하 반올림)에 의하면 2007년 이후 2016년 12월까지 삼성 반도체, 디스플레이 노동자의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78명에 이른다.
게다가 2004년 경기도 화성에 있는 디스플레이(LCD, DVD) 부품 사업장에서 일하던 태국 노동자 8명이 하반신 마비로 걷지 못하게 된 사건, 2006년 경기도 광주에서, 부천에서, 구미에서 반도체 하청기업의 이주 노동자들이 사망한 사건 등 반도체 관련 산업에서 발병하고 사망한 노동자의 직업병까지 고려하면 반도체 산업으로 인한 피해는 이 산업의 성장에 발맞춰 피해 정도와 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1) 그런데도 정치권도, 대부분의 언론도 반도체 산재 피해자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비단 정치권과 언론만의 문제도 아니다.
반도체 산업에서 산재를 일으킨 원인물질이 생리대 문제를 일으킨 유해물질과 유사하고 피해 정도, 피해 기간은 물론 피해자도 절대 작지 않은데도 소비자는 삼성 직업병에 관심이 없다. 가습기살균제, 살충제달걀, 유해생리대 문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과 대응에 견주어 보면 반도체 산재에 대한 무관심은 놀라울 정도다. 집안에 삼성전자 물건을 쌓아놓고 소비하는 삼성 소비자가 무관심한 사이 삼성은 피해를 부정하고 약속한 보상마저 늦추고 있다(■ 관련 기사: 반도체 백혈병 논란의 오해와 진실-삼성의 다섯 가지 거짓말).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기도 한, 삼성 소비자의 무관심 속에서 지난 10년간 삼성반도체 산재 피해자와 반올림 같은 피해자 지원단체만 진실규명을 위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케모포비아’(chemphobia, 화학 생활용품 공포증)란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화학물질에 대해 민감해진 소비자와 시민이 유해화학물질로 인한 반도체 산재에 둔감한 이유는 무엇일까? 상품의 직접적 유해성만 아니면 물건을 생산하는 작업환경이 어떠하든 소비자는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일까? 소비자는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유해물질로 인한 잠재적 피해자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정말 작업환경 문제가 소비자와 시민의 문제는 아닌 것일까?
유해생리대에서는 톨루엔, 스타이렌, 1,2,3-트리메틸벤젠 같은 접착제의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문제가 되었다. 삼성반도체에서도 트리클로로에틸렌(TCE), 시너, 감광액(PR), 디메틸아세트아미드, 아르신(AsH₃), 황산(H₂SO₄) 과 같은 발암물질을 포함한 세척, 식각제에 쓰인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유해 생리대에서 문제가 된 세척제와 접착제에 포함된 유해물질은 반도체 공정에서 문제가 된 유해물질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휘발성 유기화합물이다.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유해성으로 산업현장이나 상품에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자 국가는 규제 대상 물질을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표 1. 휘발성 유기화합물질 설명, 규제 대상 물질, VOC 물질별 위해성).
표 1. 휘발성 유기화합물 규제 대상 물질
연번 | 제품 및 물질명 | 연번 | 제품 및 물질명 |
1 | 아세트알데히드 | 20 | 메탄올 |
2 | 아세틸렌 | 21 | 메틸에틸케톤 |
3 | 아세틸렌 디클로라이드 | 22 | 메틸렌클로라이드 |
4 | 아크롤레인 | 23 | 엠티비이(MTBE) |
5 | 아크릴로니트릴 | 24 | 프로필렌 |
6 | 벤젠 | 25 | 프로필렌옥사이드 |
7 | 1,3-부타디엔 | 26 | 1,1,1-트리클로로에탄 |
8 | 부탄 | 27 | 트리클로로에탄 |
9 | 1-부텐, 2-부텐 | 28 | 휘발유 |
10 | 사염화탄소 | 29 | 납사 |
11 | 클로로포름 | 30 | 원유 |
12 | 사이클로헥산 | 31 | 아세트산(초산) |
13 | 1,2-디클로로에탄 | 32 | 에틸벤젠 |
14 | 디에틸아민 | 33 | 니트로벤젠 |
15 | 디메틸아민 | 34 | 톨루엔 |
16 | 에틸렌 | 35 | 테트라클로로에틸렌 |
17 | 포름알데히드 | 36 | 자일렌(o-,m-,p-포함) |
18 | n-헥산 | 37 | 스틸렌 |
19 | 이소프로필 알콜 | | |
삼성 반도체 산재의 경우 규제대상이 된 유해물질조차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생긴 것이기는 하지만 규제대상이 된 휘발성 유기화합물질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규제대상이 된 물질은 용도가 다양하거나 성능이 뛰어나고 가격이 저렴해 널리 쓰이는 바람에 그 과정에서 유해성이 드러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규제대상이 아닌 물질이라고 해서 안전하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화학물질은 약 10만여 종에 이르며 전 세계적으로 매년 2000여 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개발되어 상품화되고, 국내에서도 매년 400여 종의 신규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2) 이렇게 많은 화학물질에 대한 정부의 규제나 관리는 소비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과 거리가 멀어 사실 화학물질의 위해성에 대해 충분히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가습기 살균제에 쓰인 PHMG, PGH, MCIT와 같은 살균제처럼 상대적으로 안전한 물질이지만 쓰이는 방법(분무)에 따라 매우 위험한 물질이 되기도 하고 상식과는 다르게 고농도가 아니라 저농도에서 위해성을 나타내는 물질도 있다(화학물질, '안전기준'만 충족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또 단일물질로 사용할 때는 안전하던 물질이 다른 물질과 함께 사용할 때는 해롭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개별물질이 어떻게 얼마나 사용되어야 위해한지에 대해 제대로 연구된 것이 매우 적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화학물질 특히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경우는 그 위해성이 사고와 경험을 통해 드러난다.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이처럼 작업장과 소비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지만 작업장에서는 용도가 다양해 널리 쓰이고 특히 반도체 산업 같은 전자산업에서는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용도나 쓰이는 양이 많다. 반도체 칩 한 개를 만드는데 1.7㎏의 화석연료와 화학약품이 쓰이고 컴퓨터 한 대를 만드는데 상당수의 발암물질을 포함한 천 가지 이상의 화학물질이 한데 섞여야 한다. 청정산업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도체 산업이야말로 유해물질의 독성실험실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다.3)
산업안전보건법에서는 산재의 발생을 은폐해서는 안되며(제10조), 신규 화학물질을 제조하거나 수입하려면 위해성, 위험성을 조사하여야 하고(제40조), 화학물질의 명칭, 구성성분의 명칭 및 함유량, 안전·보건상의 취급 주의 사항, 건강 유해성 및 물리적 위험성 등을 기재한 물질 안전보건자료에 대해 작업자에게 공개하고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제41조)고 밝히고 있다. 또 안전·보건상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만을 분리하여 도급(하도급을 포함한다)을 할 수 없다(제28조)고도 분명히 적고 있다.
작업환경 때문에 산재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감추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제대로 원인 진단에만 나섰어도 유해물질로 인한 노동자의 피해를 더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만 지켰어도 100명 가까운 삼성반도체 사망자와 하반신 마비가 된 8명의 태국 노동자와 파악조차 되지 않은 이주 노동자를 포함한 하청업체 노동자의 산재 문제는 예방되거나 최소한의 보상 문제라도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작업장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화학물질의 안전성 검사나 정보의 공개만 이루어졌어도 노동자는 물론 소비자의 피해도 줄이거나 빨리 해결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작업장에서 위해성이 확인된 물질만이라도 쓰이지 않았더라면, 생리대와 같은 상품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 작업공정에서 쓰인 물질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고 공개만 되었더라면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물질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품을 생산하는 데 쓰이는 물질에 대한 정보가 노동자뿐 아니라 소비자에게까지 법대로만 공개되어도 유해한 물질이 상품 생산에 쓰이는 일도 상품의 유해성이 발견되었을 때 우왕좌왕 원인을 찾아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크게 줄일 수 있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작업환경에 대한 정보가 기업의 이익을 위한 기밀유지보다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서는 더 중요하고 절실하다(SK는 하고 삼성은 하지 못한 것).
수많은 유해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에서 작업자의 안전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들이 결국 유해물질을 걸러내는 최소한의 조처가 되기 때문에라도 소비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상품의 작업환경과 산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업장에서 사용되는 유해물질은 많든 적든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제품에도 섞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상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사업장에서 쓰이는 유해물질에 대한 소비자의 감시가 필요하다. 또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노동자의 산재 피해를 통해 물질의 유해성이 드러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의 산재 피해에 대해 소비자가 관심을 갖고 해결 과정을 지켜보고 지원하는 일은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작업환경만 제대로 관리되어도 가습기 살균제 문제나 유해성 생리대 문제는 생겨나지 않거나 더 빨리 원인이 밝혀져 해법을 강구할 수도 있었다. 생산품에 유해한 물질이 사용되는 것을 막거나 최소한 어떤 물질이 사용되는지를 보다 빨리 파악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 나라에서 온 이주 노동자의 산재 문제가, 2017년 한 해에만 55조의 이익을 냈다면서도 산재보상에는 인색한 삼성전자의 산재 문제가, 사실 화학물질로 범벅된 소비재를 집안에 쌓아놓고 사는 소비자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해작업장에서 더 많은 농도로 더 많은 물질에 더 오랜 시간 노출되는 노동자의 작업환경이 상품의 위해성을 막아내는 방파제이기 때문이다.
삼성반도체가 영업비밀을 내세워 공개하고 있지 않은 물질정보를 공개하라며 산재 피해자와 반올림은 지난 10여년간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노동자가 내민 외로운 손을 삼성을 포함한 전자·반도체 제품 소비자가, 알려지지 않은 알 수도 없는 유해물질의 잠재적 피해자인 소비자가 맞잡아줘야 한다. 노동자는 소비자 앞에서 먼저 유해물질을 겪어내는 선험적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이수경/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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