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은비사건 죄명이 애걔~ 재산손괴죄?
학살도 보호도 사람 중심, 중죄로 인식 안 돼
분류도 먹을 수 있는 건 ‘참…’ 못 먹는 건 ‘개…’

최근 우리나라에도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시민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들의 활동으로 수면 아래 있던 동물 학대가 하나 둘 드러나고 있다. 동물권리 운동단체인 동물사랑실천협회가 지난달 4일 ‘세계 동물의 날’을 맞아 내놓은 보도자료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새끼를 낳은 지 일주일 된 푸들이 젖을 물리고 있는데 주인이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었다.
20대 여성에게 끔찍하게 맞은 뒤 아파트 밖으로 내던져진 고양이 은비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은비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가해자에게 징역 4개월을 구형했고 법원은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흥미로운 건 검찰이 기소한 죄명이 동물보호법이 아닌 재물손괴죄였는데, 그쪽의 처벌이 더 무겁기 때문이었다. 결국 은비 사건은 반려동물에 대한 학대가 아니라 150만 원을 주고 사온 재산에 손실을 끼친 사건으로 규정된 셈이다.
조류독감 확산 막기 위해 규정 어기고 생매장
아직 동물 학대는 사회적으로 무거운 죄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동물사랑실천협회는 “17층 아파트에서 어미와 새끼 고양이를 떨어뜨려 죽여도 벌금 5만 원, 살아있는 고양이를 불에 태워 죽여도 벌금 20만 원, 수개월 동안의 폭행으로 70여 군데나 골절이 된 개에 대한 학대도 20만 원”이라며 “우리나라 동물보호법상 최고형인 500만 원 벌금인데, 이보다 더한 학대는 무엇이란 말인가?”고 처벌 강화를 주장했다.
명백하지 않은 동물 학대도 있다. 모피 옷 착용, 개의 식용, 공장식 가축 사육 등 훨씬 ‘학대’의 규모가 크지만 논란의 소지도 많다. 동물 보호론자가 모피가 될 처지의 밍크를 몰래 풀어놓았더니 그 대부분은 부근 고속도로에서 차에 깔려 죽었고, 살아남은 것들은 외래종이 되어 토종 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문제가 생긴 영국의 사례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동물을 어떻게 보느냐는 가치관이 걸린 문제이고, 또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렇지만 동물 학대를 막자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사람의 전염병을 막는 급한 상황에서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 국제기구로부터 동물 학대를 한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조류독감을 막기 위해 정부가 닭과 오리를 살처분했는데, 이산화탄소로 질식시켜 안락사 시켜야 하는 국제규정을 어기고 산 채로 매장한 사례가 있다고 세계보건기구 보고서가 지적했다. 동물보호단체들은 이런 불법적이고 무신경한 동물 학대가 전국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야생동물 씨 말리던 식민주의자들이 보호 나선 동물
야생동물을 보호하자는 생각은 20세기에나 나타난, 인류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사조이다. 인류의 역사 전체로 볼 때는 오히려 예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근대과학이 출현하기 전까지 동양이든 서양이든 야생 동식물은 인간을 중심으로 분류했다. 동물은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못 먹는 동물, 야생동물과 가축, 유용한 동물과 쓸모없는 동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프리카의 야생동물을 마구 잡아 씨가 마르게 된 20세기 초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동물보호에 나섰다. 야생동물은 보호해야 할 동물로부터 마음대로 쏴버려도 되는 해로운 동물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눴다. 해로운 동물에는 사자, 표범 등 대형 고양잇과 동물, 하이에나, 들개, 수달, 비비원숭이, 악어, 독뱀 등이 들어있었다. 이들은 요즘 대부분 보호 대상이다.
영국의 박물학자 윌리엄 콜은 1656년에 낸 책에서 초본을 삶아서 먹는 풀, 약초, 옥수수, 콩, 꽃, 목초, 잡초 등 7가지로 분류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먹을 수 있는 생물 이름에 ‘참’을 붙이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형태이지만 먹지 못하는 것에는 ‘개’를 붙였다.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 꽃잎을 먹는 참꽃(진달래), 참새, 참나물, 참나리, 참치 등은 그런 예이다.
클라이브 폰팅이 지은 <녹색세계사>(이진아, 김정민 옮김, 그물코, 2만5천 원)에서 ‘약탈되는 자연’이란 장을 보면, 야생동물이 얼마나 살육됐는지 실감할 수 있다.
기원후 처음 몇 세기 동안 북아프리카에는 코끼리, 코뿔소, 얼룩말이 살고 있었고 나일 강 하류에도 하마가 있었으며 이란과 메소포타미아에는 호랑이가 살았다. 이들이 모조리 없어진 데는 원형경기장에서 야생동물을 재미로 대량으로 죽이던 로마제국 탓이 크다. 로마의 콜로세움 개관을 경축하는 100일 동안의 축제에서 야생동물 9000마리가 죽었고, 트라야뉴스 황제는 새 식민지 다키아 정복을 기념해 1만 1000마리의 동물을 죽였다.
참새 죽이기 위한 특수부대까지 만들어
이런 야생동물에 대한 태도는 유럽에서 이후에도 계속됐다. 영국 정부는 1533년 띠까마귀, 붉은부리까마귀를 죽이라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각 교구에서는 여우, 족제비, 담비, 수달, 고슴도치, 쥐, 두더지, 매, 물수리, 물총새 등의 사체를 사들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 정부가 곡물 피해를 줄이기 위해 참새를 모두 죽일 것을 명했고, 특수부대를 만들어 그 일을 시켰다. 이 작전은 성공을 거둬 하트퍼드셔 주의 트링에서만 3년 동안 3만 9천 마리의 참새를 없앴다.
인간에 의한 사상 최대 규모의 야생동물 살육은 아마도 나그네비둘기를 대상으로 저질러졌을 것이다. 이 새는 북아메리카에 약 10조 마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동을 하는 나그네비둘기 떼가 얼마나 많은지 하늘을 몇 시간씩 가릴 정도였다. 1873년 4월 8일 미시간 주 새기노에서 기록한 것을 보면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나그네비둘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사람들은 이 비둘기를 값싼 고기로 간주했다. 총 한 방으로 30~40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그물, 연기, 몽둥이 등으로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고 나서 200년 동안 이들을 잡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도 수십 만 마리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대륙횡단 철도가 뚫리고 전보가 발명돼 비둘기 고기의 수송과 이동 정보가 신속히 전달되면서 거대한 무리의 새들이 급속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1869년 한 해에 미시간 밴 뷰런에서만 750만 마리를 동부로 보냈다. 1900년 한 소년이 야생에 살던 마지막 나그네비둘기를 쏘아 떨어뜨렸다.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29년을 산 나그네비둘기 ‘마사’는 1914년 숨을 거둠으로써 이 멋진 동물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고기가 아니라 기름 때문에 대량 학살된 고래
고래에 대한 대량학살도 나그네비둘기에 못지않다. 고래잡이의 역사는 길어 선사시대부터 작살로 잡았다. 이런 포경기술은 19세기 말까지도 그대로였다.
원주민들은 자기 지역에 회유해 오는 고래를 잡는 데 그쳤지만 바이킹과 바스크족은 북대서양으로 진출해 원양포경에 처음으로 나섰다. 1610~1840년엔 네덜란드와 영국인이 뒤를 따랐고, 1820~1860년엔 미국인들이 대규모 포경선단을 꾸려 태평양을 누볐다.
그들이 원한 것은 고기가 아니라 기름이었다. 아직 석유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전에 고래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주요한 연료였다. 1740년대 런던에서 가로등 5000여개가 고래기름으로 길을 밝혔다. 고래기름은 기계의 유일한 윤활유 원료였고, 고래뼈와 수염으로는 코르셋, 우산살, 낚싯대, 칼자루 등 오늘날의 플라스틱처럼 널리 쓰였다.
18세기까지 주요 포경 대상은 참고래였다. 움직임이 둔해서 노를 저어 접근하기 쉬웠고 죽으면 물에 떴기 때문에, 고래에 작살을 박은 뒤 고래가 지쳐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이름 앞에 ‘참’(true) 자가 붙었다.
향유고래도 고급 지방과 ‘용연 향’이란 값비싼 향수 원료를 얻을 수 있어 주요 표적이 됐다. 두 고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고래어장은 곧 붕괴됐다.
20세기 초 포경산업을 다시 일으킨 것은 기술개발이었다. 노 대신 증기기관을 단 배, 작살포를 장착한 배, 잡은 고래를 즉석에서 해체해 기름창고에 저장할 수 있는 공장선 등이 출현했다. 깊은 물속에서 빠르게 헤엄쳐 그때까지 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대형 수염고래 종류들이 새롭게 포경 대상이 됐다.

자연 약탈 앞장 선진국일수록 보호 이데올로기 강한 아이러니
기술개발을 이끈 노르웨이는 북대서양과 남극해의 혹등고래를 고갈시켰다. 고래기름이 마가린과 비누, 글리세린의 원료로 쓰이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자 영국, 아르헨티나, 미국, 덴마크, 독일 등도 새로운 고래사냥에 뛰어들었다. 1930년대엔 일본, 1940년대엔 소련도 이 대열에 가담했다.
지구상 최대 동물인 대왕고래는 1900년 남극해에 15만~25만 마리가 서식했지만 1989년 500 마리로 줄었다. 1930년대까지 해마다 17만 마리를 잡던 흰긴수염고래의 어획고는 1960년대 7000 마리로, 1970년대엔 23 마리로 격감했다.
1960년대에 이르면 대부분의 포경업자는 파산지경에 이른다. 영국 등 많은 나라들이 공식적으로 포경을 중단했다. 고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마침내 1986년 상업포경은 전면 중단된다.
엊그제까지 곡식과 물고기를 먹는다고 참새와 물총새를 때려잡던 영국에서는 왕립조류보호협회(RSPB)에 회비를 내는 회원만 100만 명이 넘는다. 고래를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미국, 영국, 독일 등은 일본과 ,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이 아직도 고래를 잡는다며 미개국가 취급을 한다.
자연을 가장 많이 약탈한 선진국일수록 자연보호 이데올로기가 강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잘 살수록 동물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만일 기후변화나 식량위기 등으로 인류의 생존여건이 악화되더라도 그런 동물사랑이 계속될 것일까.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분류도 먹을 수 있는 건 ‘참…’ 못 먹는 건 ‘개…’

최근 우리나라에도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시민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들의 활동으로 수면 아래 있던 동물 학대가 하나 둘 드러나고 있다. 동물권리 운동단체인 동물사랑실천협회가 지난달 4일 ‘세계 동물의 날’을 맞아 내놓은 보도자료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새끼를 낳은 지 일주일 된 푸들이 젖을 물리고 있는데 주인이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었다.
20대 여성에게 끔찍하게 맞은 뒤 아파트 밖으로 내던져진 고양이 은비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은비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가해자에게 징역 4개월을 구형했고 법원은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흥미로운 건 검찰이 기소한 죄명이 동물보호법이 아닌 재물손괴죄였는데, 그쪽의 처벌이 더 무겁기 때문이었다. 결국 은비 사건은 반려동물에 대한 학대가 아니라 150만 원을 주고 사온 재산에 손실을 끼친 사건으로 규정된 셈이다.
조류독감 확산 막기 위해 규정 어기고 생매장
아직 동물 학대는 사회적으로 무거운 죄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동물사랑실천협회는 “17층 아파트에서 어미와 새끼 고양이를 떨어뜨려 죽여도 벌금 5만 원, 살아있는 고양이를 불에 태워 죽여도 벌금 20만 원, 수개월 동안의 폭행으로 70여 군데나 골절이 된 개에 대한 학대도 20만 원”이라며 “우리나라 동물보호법상 최고형인 500만 원 벌금인데, 이보다 더한 학대는 무엇이란 말인가?”고 처벌 강화를 주장했다.
명백하지 않은 동물 학대도 있다. 모피 옷 착용, 개의 식용, 공장식 가축 사육 등 훨씬 ‘학대’의 규모가 크지만 논란의 소지도 많다. 동물 보호론자가 모피가 될 처지의 밍크를 몰래 풀어놓았더니 그 대부분은 부근 고속도로에서 차에 깔려 죽었고, 살아남은 것들은 외래종이 되어 토종 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문제가 생긴 영국의 사례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동물을 어떻게 보느냐는 가치관이 걸린 문제이고, 또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렇지만 동물 학대를 막자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사람의 전염병을 막는 급한 상황에서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 국제기구로부터 동물 학대를 한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조류독감을 막기 위해 정부가 닭과 오리를 살처분했는데, 이산화탄소로 질식시켜 안락사 시켜야 하는 국제규정을 어기고 산 채로 매장한 사례가 있다고 세계보건기구 보고서가 지적했다. 동물보호단체들은 이런 불법적이고 무신경한 동물 학대가 전국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야생동물 씨 말리던 식민주의자들이 보호 나선 동물
야생동물을 보호하자는 생각은 20세기에나 나타난, 인류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사조이다. 인류의 역사 전체로 볼 때는 오히려 예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근대과학이 출현하기 전까지 동양이든 서양이든 야생 동식물은 인간을 중심으로 분류했다. 동물은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못 먹는 동물, 야생동물과 가축, 유용한 동물과 쓸모없는 동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프리카의 야생동물을 마구 잡아 씨가 마르게 된 20세기 초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동물보호에 나섰다. 야생동물은 보호해야 할 동물로부터 마음대로 쏴버려도 되는 해로운 동물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눴다. 해로운 동물에는 사자, 표범 등 대형 고양잇과 동물, 하이에나, 들개, 수달, 비비원숭이, 악어, 독뱀 등이 들어있었다. 이들은 요즘 대부분 보호 대상이다.
영국의 박물학자 윌리엄 콜은 1656년에 낸 책에서 초본을 삶아서 먹는 풀, 약초, 옥수수, 콩, 꽃, 목초, 잡초 등 7가지로 분류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먹을 수 있는 생물 이름에 ‘참’을 붙이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형태이지만 먹지 못하는 것에는 ‘개’를 붙였다.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 꽃잎을 먹는 참꽃(진달래), 참새, 참나물, 참나리, 참치 등은 그런 예이다.
클라이브 폰팅이 지은 <녹색세계사>(이진아, 김정민 옮김, 그물코, 2만5천 원)에서 ‘약탈되는 자연’이란 장을 보면, 야생동물이 얼마나 살육됐는지 실감할 수 있다.
기원후 처음 몇 세기 동안 북아프리카에는 코끼리, 코뿔소, 얼룩말이 살고 있었고 나일 강 하류에도 하마가 있었으며 이란과 메소포타미아에는 호랑이가 살았다. 이들이 모조리 없어진 데는 원형경기장에서 야생동물을 재미로 대량으로 죽이던 로마제국 탓이 크다. 로마의 콜로세움 개관을 경축하는 100일 동안의 축제에서 야생동물 9000마리가 죽었고, 트라야뉴스 황제는 새 식민지 다키아 정복을 기념해 1만 1000마리의 동물을 죽였다.
참새 죽이기 위한 특수부대까지 만들어
이런 야생동물에 대한 태도는 유럽에서 이후에도 계속됐다. 영국 정부는 1533년 띠까마귀, 붉은부리까마귀를 죽이라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각 교구에서는 여우, 족제비, 담비, 수달, 고슴도치, 쥐, 두더지, 매, 물수리, 물총새 등의 사체를 사들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 정부가 곡물 피해를 줄이기 위해 참새를 모두 죽일 것을 명했고, 특수부대를 만들어 그 일을 시켰다. 이 작전은 성공을 거둬 하트퍼드셔 주의 트링에서만 3년 동안 3만 9천 마리의 참새를 없앴다.
인간에 의한 사상 최대 규모의 야생동물 살육은 아마도 나그네비둘기를 대상으로 저질러졌을 것이다. 이 새는 북아메리카에 약 10조 마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동을 하는 나그네비둘기 떼가 얼마나 많은지 하늘을 몇 시간씩 가릴 정도였다. 1873년 4월 8일 미시간 주 새기노에서 기록한 것을 보면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나그네비둘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사람들은 이 비둘기를 값싼 고기로 간주했다. 총 한 방으로 30~40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그물, 연기, 몽둥이 등으로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고 나서 200년 동안 이들을 잡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도 수십 만 마리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대륙횡단 철도가 뚫리고 전보가 발명돼 비둘기 고기의 수송과 이동 정보가 신속히 전달되면서 거대한 무리의 새들이 급속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1869년 한 해에 미시간 밴 뷰런에서만 750만 마리를 동부로 보냈다. 1900년 한 소년이 야생에 살던 마지막 나그네비둘기를 쏘아 떨어뜨렸다.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29년을 산 나그네비둘기 ‘마사’는 1914년 숨을 거둠으로써 이 멋진 동물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고기가 아니라 기름 때문에 대량 학살된 고래
고래에 대한 대량학살도 나그네비둘기에 못지않다. 고래잡이의 역사는 길어 선사시대부터 작살로 잡았다. 이런 포경기술은 19세기 말까지도 그대로였다.
원주민들은 자기 지역에 회유해 오는 고래를 잡는 데 그쳤지만 바이킹과 바스크족은 북대서양으로 진출해 원양포경에 처음으로 나섰다. 1610~1840년엔 네덜란드와 영국인이 뒤를 따랐고, 1820~1860년엔 미국인들이 대규모 포경선단을 꾸려 태평양을 누볐다.
그들이 원한 것은 고기가 아니라 기름이었다. 아직 석유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전에 고래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주요한 연료였다. 1740년대 런던에서 가로등 5000여개가 고래기름으로 길을 밝혔다. 고래기름은 기계의 유일한 윤활유 원료였고, 고래뼈와 수염으로는 코르셋, 우산살, 낚싯대, 칼자루 등 오늘날의 플라스틱처럼 널리 쓰였다.
18세기까지 주요 포경 대상은 참고래였다. 움직임이 둔해서 노를 저어 접근하기 쉬웠고 죽으면 물에 떴기 때문에, 고래에 작살을 박은 뒤 고래가 지쳐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이름 앞에 ‘참’(true) 자가 붙었다.
향유고래도 고급 지방과 ‘용연 향’이란 값비싼 향수 원료를 얻을 수 있어 주요 표적이 됐다. 두 고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고래어장은 곧 붕괴됐다.
20세기 초 포경산업을 다시 일으킨 것은 기술개발이었다. 노 대신 증기기관을 단 배, 작살포를 장착한 배, 잡은 고래를 즉석에서 해체해 기름창고에 저장할 수 있는 공장선 등이 출현했다. 깊은 물속에서 빠르게 헤엄쳐 그때까지 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대형 수염고래 종류들이 새롭게 포경 대상이 됐다.

자연 약탈 앞장 선진국일수록 보호 이데올로기 강한 아이러니
기술개발을 이끈 노르웨이는 북대서양과 남극해의 혹등고래를 고갈시켰다. 고래기름이 마가린과 비누, 글리세린의 원료로 쓰이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자 영국, 아르헨티나, 미국, 덴마크, 독일 등도 새로운 고래사냥에 뛰어들었다. 1930년대엔 일본, 1940년대엔 소련도 이 대열에 가담했다.
지구상 최대 동물인 대왕고래는 1900년 남극해에 15만~25만 마리가 서식했지만 1989년 500 마리로 줄었다. 1930년대까지 해마다 17만 마리를 잡던 흰긴수염고래의 어획고는 1960년대 7000 마리로, 1970년대엔 23 마리로 격감했다.
1960년대에 이르면 대부분의 포경업자는 파산지경에 이른다. 영국 등 많은 나라들이 공식적으로 포경을 중단했다. 고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이유에서였다. 마침내 1986년 상업포경은 전면 중단된다.
엊그제까지 곡식과 물고기를 먹는다고 참새와 물총새를 때려잡던 영국에서는 왕립조류보호협회(RSPB)에 회비를 내는 회원만 100만 명이 넘는다. 고래를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미국, 영국, 독일 등은 일본과 ,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이 아직도 고래를 잡는다며 미개국가 취급을 한다.
자연을 가장 많이 약탈한 선진국일수록 자연보호 이데올로기가 강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잘 살수록 동물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만일 기후변화나 식량위기 등으로 인류의 생존여건이 악화되더라도 그런 동물사랑이 계속될 것일까.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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