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 풀려고 한 시간 15회 짝짓기하는 ‘쌀 벌레’

조홍섭 2016. 02. 18
조회수 60083 추천수 0

극도로 건조한 곡식창고 환경서 수분 확보 위한 행동
수컷은 수분 상실로 수명 단축 대가…세계적 곡물 해충

 

Peggy Greb_Tribolium_castaneum.jpg » 인도와 호주가 원산이지만 전 세계 곡물창고로 서식지를 넓힌 거짓쌀도둑거저리 성체. 사진=Peggy Greb, 위키미디어 코먼스


‘거짓쌀도둑거저리’란 낯선 이름을 가진 딱정벌레가 있다. 길이 2~3㎜에 적자색 광택이 나는 곤충인데, 실물을 보면 많이 본 벌레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도와 호주가 원산인 이 곤충은 더운 지방에 살지만 춥지 않고 먹을 것이 많은 곡물 창고를 주 서식지로 삼았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곡물 해충의 하나다. 오래 보관한 쌀독이나 밀가루 포대에서 어리쌀바구미나 화랑곡나방과 함께 발견할 수 있다.
 

Professor Matthew Gage.jpg » 거짓쌀도둑거저리의 짝짓기 모습. 사진=Professor Matthew Gage


이 딱정벌레는 곡식 도둑으로서뿐 아니라 생물학자들에게는 ‘섹스 광’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암컷은 수컷을 가리지 않고 별다른 사전 의식도 없이 짝짓기에 돌입한다.
 
암컷은 한 번 짝짓기로 140일까지 산란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짝짓기는 끝없이 이어져 한 시간에 15번까지 한 기록도 있다.
 
왜 이렇게 짝짓기를 자주 하는 것일까. 생물학자들은 그동안 잦은 짝짓기가 암컷에게 번식 성공률을 높이거나 우수한 유전자를 자손에 물려주려는 혜택을 주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Eric Day, Virginia Tech_Tribolium_castaneum87-300.jpg » 거짓쌀도둑거저리. 따뜻하고 축축한 아열대 지방에서 살다가 온대지방의 건조한 쌀창고에 살게 되면서 극한 환경에 적응하는 일환으로 잦은 짝짓기를 하게 됐다. 사진=Eric Day, Virginia Tech, 위키미디어 코먼스
 
엘리자베스 드로지-영 미국 시라큐스대 생물학 박사과정생 등 연구자들은 이 딱정벌레가 사는 극단적 환경이 이런 행동을 낳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을 세웠다. 이들은 정교한 실험을 구성해 암컷이 거듭된 짝짓기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언지 충분한 정자 확보, 산란 촉진, 영양분 섭취, 수분 섭취 등 네 가지 가정을 세워 확인했다.
 
이들은 과학저널 <행동 생태학>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네 가지 가능성 가운데 수분 섭취가 잦은 짝짓기의 원인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물 부족을 정액 속 수분으로 보충했다는 얘기다.
 
곡물 창고는 해충에게 최고의 환경인 것 같지만, 실은 먹이만 넘칠 뿐 극도로 건조하고 단조로운 환경이다. 곡물 사이의 틈새를 터널처럼 이용해 살아가는 이 딱정벌레는 극단적인 환경에 적응하느라 이런 생식 행동을 진화시켰다고 연구자들은 보았다.
 
드로지-영은 “보통 암컷에는 적정한 수준의 짝짓기가 있고 그 한도를 넘어서면 암컷은 더는 짝짓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딱정벌레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거짓쌀도둑거저리DSC_1423 (2).jpg » 저장한 쌀에서 생겨난 거짓쌀도둑거저리. 사진=최원교-나비대장, 다음 블로그 '한국 토종벌레 속삭임'


실제로 연구자들은 실험을 통해 암컷이 더 많은 짝짓기를 할수록 번식 성공률이 높아지는 이득을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수컷은 잦은 사정으로 수분을 잃어 수명이 짧아지는 대가를 치렀다.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수컷이 암컷에 적정 수준 이상의 짝짓기를 강요하는 것과 반대 현상”이라고 밝혔다. 곡식창고로 옮겨와 갑자기 문란해진 딱정벌레에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Elizabeth M. Droge-Young et. al., Extreme ecology and mating system: discriminating among direct benefits models in red flour beetles, Behavioral Ecology (2015), 00(00), 1.9. doi:10.1093/beheco/arv191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 메일
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얼굴에 손이 가는 이유 있다…자기 냄새 맡으려얼굴에 손이 가는 이유 있다…자기 냄새 맡으려

    조홍섭 | 2020. 04. 29

    시간당 20회, 영장류 공통…사회적 소통과 ‘자아 확인’ 수단 코로나19와 마스크 쓰기로 얼굴 만지기에 어느 때보다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이 행동이 사람과 침팬지 등 영장류의 뿌리깊은 소통 방식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침팬지 등 영장류와 ...

  • 쥐라기 바다악어는 돌고래처럼 생겼다쥐라기 바다악어는 돌고래처럼 생겼다

    조홍섭 | 2020. 04. 28

    고래보다 1억년 일찍 바다 진출, ’수렴 진화’ 사례 공룡 시대부터 지구에 살아온 가장 오랜 파충류인 악어는 대개 육지의 습지에 산다. 6m까지 자라는 지상 최대의 바다악어가 호주와 인도 등 동남아 기수역에 서식하지만, 담수 악어인 나일악어...

  • ‘과일 향 추파’ 던져 암컷 유혹하는 여우원숭이‘과일 향 추파’ 던져 암컷 유혹하는 여우원숭이

    조홍섭 | 2020. 04. 27

    손목서 성호르몬 분비, 긴 꼬리에 묻혀 공중에 퍼뜨려 손목에 향수를 뿌리고 데이트에 나서는 남성처럼 알락꼬리여우원숭이 수컷도 짝짓기철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과일 향을 내뿜는다. 사람이 손목의 체온으로 향기를 풍긴다면, 여우원숭이는 손목 분...

  • 뱀을 향한 뿌리 깊은 공포, 새들도 그러하다뱀을 향한 뿌리 깊은 공포, 새들도 그러하다

    조홍섭 | 2020. 04. 23

    어미 박새, 뱀 침입에 탈출 경보에 새끼들 둥지 밖으로 탈출서울대 연구진 관악산서 9년째 조사 “영장류처럼 뱀에 특별 반응” 6달 된 아기 48명을 부모 무릎 위에 앉히고 화면으로 여러 가지 물체를 보여주었다. 꽃이나 물고기에서 평온하던 아기...

  • 금강산 기암 절경은 산악빙하가 깎아낸 ‘작품'금강산 기암 절경은 산악빙하가 깎아낸 ‘작품'

    조홍섭 | 2020. 04. 22

    북한 과학자, 국제학술지 발표…권곡·U자형 계곡·마찰 흔적 등 25곳 제시 금강산의 비경이 형성된 것은 2만8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쌓인 두꺼운 얼음이 계곡을 깎아낸 결과라는 북한 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나왔다. 북한의 이번 연구는 금강산을...

인기글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