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야근, 사람은 주근…네팔 국립공원의 어떤 공존

조홍섭 2012. 09. 05
조회수 31897 추천수 1

치트완 국립공원 호랑이 주민과 같은 길 다른 시간 오가며 충돌 피해

인구밀도 높아져도 호랑이 줄지 않는 공존 이뤄…20세기 초 한반도도 비슷했나?

 

12-10490large.jpg » 네팔 치트완 국립공원에서 무인 감시 카메라에 촬영된 호랑이. 사진=미시간 주립대 시스템 통합 및 지속가능성 센터

 

카리스마 있는 포식자인 호랑이는 자신만의 사냥터인 영역을 넓게 확보한다. 암컷이라면 20㎢, 수컷은 60~100㎢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산국립공원 전체가 수컷 호랑이 한 마리의 영역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20세기 이후 전 세계 호랑이의 97%가 줄어들어 현재 3000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가장 큰 이유도 사람에 의해 서식지가 줄고 분단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랑이를 보전하려면 사람이 없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게 통념이었고, 몇 안 되는 호랑이 서식지에서 숲에서 생계를 꾸리는 주민을 쫓아내는 방식으로 보호구역을 지정하고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통념을 깨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미시간 주립대 이스트 랜싱 캠퍼스의 시스템 통합 및 지속가능성 센터와 네팔 연구자들은 최근 <미 국립과학원회보>에 실린 논문을 통해 호랑이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였다.
 

trap.jpg » 연구진이 치트완 국립공원 150곳에 움직이는 동물을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다. 사진=미시간 주립대 시스템 통합 및 지속가능성 센터

 

연구진은 네팔의 히말라야 산맥 산자락에 있는 세계적인 호랑이 서식지인 치트완 국립공원 안팎 150곳에 2010~2011년 동안 무인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 조사를 벌였다.
 

면적이 1000㎢가 넘는 이 국립공원에는 121마리의 호랑이가 살고 있다. 그런데 이 공원 주변엔 세계 어느 호랑이 서식지보다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주민들은 숲에서 땔나무를 베고 가축에 줄 꼴을 베어 온다. 최근엔 관광객도 늘어났다. 무장 군인들은 이 국제적인 보호구역에서 밀렵꾼과 벌목꾼을 잡기 위해 차량으로 끊임없이 순찰한다.
 

연구진은 이런 인간의 간섭이 호랑이 서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조사한 것이다. 카메라에 가장 많이 찍힌 동물은 당연히 사람으로 전체의 75%를 차지했다.

IMG_0296.jpg » 치트완 국립공원에서 드물게 촬영된 낮 동안 활동하는 호랑이. 사진=미시간 주립대 시스템 통합 및 지속가능성 센터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과 자동차의 출입이 호랑이의 출현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호랑이와 사람은 똑같은 길을 이용하고 있었다. 특히 땔감 채취 등이 주로 이뤄지는 오솔길을 피해 이동이 쉬운 대로를 이용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자주 찍혔다.
 

호랑이와 사람은 같은 길을 이용하지만 시간은 달랐다. 보통 호랑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 영역을 순찰한다. 그런데 이곳 호랑이는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호랑이보다 낮 동안의 활동이 6분의 1 이하였다. 특히 땔감 채취가 집중되는 공원 밖에서 호랑이는 낮 동안 거의 출몰하지 않았다.

 graph2.jpg » 국립공원 안(A-E)과 밖(F-J)에서 시간대별(0시부터 24시까지 6시간이 한 눈금) 사람(실선)과 호랑이(점선)의 활동 정도.A, F는 전체, B, G는 주민, C, H는 관광객, D, I는 군인, E, J는 차량을 가리킨다. 그림=미시간 주립대 시스템 통합 및 지속가능성 센터

 

반면 사람들은 호랑이가 ‘출근’하는 저녁부터 숲에 가는 것을 꺼렸다. 호랑이와 사람들은 마치 교대근무자처럼 사람은 주간 근무를 호랑이는 야근을 하며 한 장소를 사이좋게 공유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이 때문에 최근 이 지역 인구밀도가 20%나 늘었는데도 높은 호랑이 밀도(북한산국립공원 면적에 약 5마리 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했다.
 

사실 이 지역에서도 호랑이에게 가축을 빼앗기거나 사람이 잡아먹히는 사례도 있지만 매우 드물고, 실제로 주민들이 호랑이를 목격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47058.jpg » 치트완 국립공원에서 촬영된 호랑이. 사진=미시간 주립대 시스템 통합 및 지속가능성 센터


 

이 논문은 “호랑이가 인간이 지배적인 경관 속에서도 공간과 시간에 따른 활동을 사람과 달리함으로써 잘 적응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며 “호랑이 보전을 위해서는 인구밀도 자체를 줄이기보다 밀렵 방지, 가축 방목 제한을 통한 먹이 동물 증대 등의 서식지 조건 개선 정책이 더 중요함을 이 연구결과는 보여 준다”고 강조했다.
 

연구의 교신저자인 장궈 류 시스템 통합 및 지속가능성 센터 연구원은 “지구에 점점 사람이 많아지면서 사람과 자연체계를 모두 고려하는 창조적인 해법이 더욱 필요해졌다”며 “이 연구에서 우리는 인간과 자연이 모두 번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네팔의 아주 흥미로운 사례를 발견했다”고 미시건 주립대학이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일제 강점기(1919~1924) 동안 한반도에서 잡힌 호랑이와 표범의 수

호랑이도표.JPG

 

한편, 이 논문은 20세기 초까지 인구밀도가 높은 한반도에 호랑이가 높은 밀도로 서식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일제 강점기인 1919~1925년 사이 5년 동안 전국에서 포수를 동원해 잡은 호랑이는 무려 65마리에 이른다.
 

또 최근에는 전남 진도에서도 호랑이 4마리가 서식했다는 문건이 발견되기도 했다. 한국범보전기금(대표 이항 서울대 교수)는 영국에서 1915년 발간된 <아시아와 북미에서의 수렵>이란 책에서 포드 바클레이가 진도에 호랑이 4마리가 서식하는 것을 확인한 후 그 중 성숙한 호랑이 암·수 한마리 씩을 포획했다고 기록했다고 밝혔다.

 

그는 나머지 2마리를 좇아 10일간 섬을 헤매었지만 흔적을 찾지 못해 육지로 도망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3주일 뒤 다시 진도에서 호랑이 두 마리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내용도 추가하고 있다.
 

한국범보전기금은 “이는 100년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 전역에 호랑이가 서식하였고, 기후와 서식 여건이 양호한 일부 지역은 서식 밀도가 매우 높아 섬에까지 호랑이가 진출하였으며, 섬에서의 서식 밀도도 높았음을 보여준다”고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Coexistence between wildlife and humans at fine spatial scales
Neil H. Carter, Binoj K. Shrestha, Jhamak B. Karki, Narendra Man Babu Pradhan, and Jianguo Liu
PNAS,
www.pnas.org/cgi/doi/10.1073/pnas.1210490109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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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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