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과 분노, 그리고 삶…체르노빌 사람들

조홍섭 2011. 05. 02
조회수 18221 추천수 0
  “일본에 미리 경고하지 못한 게 아쉽다”
 돼지비계 넣은 식빵 먹으며, 소개된 마을서 여생

  
 

열흘 동안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취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정부 관료, 환경단체 활동가, 원자력 과학자, 체르노빌 주민 등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여운이 길게 남는 이들이 있습니다.
 
 

체르노빌 재정착촌_parishiv 마을_halina05 (1).jpg

파리쉬브 마을에 사는 할리나 야브첸코
 
 
 

놀랍게도 체르노빌 소개 구역(반경 30㎞ 안)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 모두 소개됐지만 고향을 잊을 수 없어서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한때 2000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지만, 지금은 우파취취, 파리쉬브, 쿠포바테 마을 등 9개 마을에 약 250명이 삽니다. 대부분 50~60대 이상의 노인입니다. 정부가 노인들의 거주를 묵인하고 있지만, 젊은이와 어린이들의 거주는 불허하고 있습니다.
 

 
체르노빌 원전에서 약 17㎞ 떨어진 파리쉬브 마을에서 만난 할리나 야브첸코 할머니입니다. 얼마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지금은 소개된 마을에서 몇 명의 주민들과 함께 삽니다. 인터뷰를 하던 중 식빵에 돼지 비계를 올린 러시아 전통 음식을 건네주시더군요. 인터뷰가 끝난 뒤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체르노빌 재정착촌_parishiv_이바노비치 부부.jpg

파리쉬브 마을의 이반 이바노비치, 마리아 콘드라드빠나 부부
 
 

 
역시 파리쉬브 마을에서 만난 이반 이바노비치, 마리아 콘드라드빠나 부부입니다. 파리쉬브 마을에서 가장 활력 있고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정원에는 닭이며 오리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금방 쓴 듯한 농기구, 걸어놓은 빨래, 불 피우는 냄새…. 잡목으로 가득 찬 집 밖을 보지 않는다면, 부부의 집이 체르노빌의 한가운데 있다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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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수습에 참여한 게오르그 레핀 박사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만난 게오르그 레핀 박사입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 자원해서 사고 수습을 위해 체르노빌로 간 핵공학자입니다. 로봇을 투입해 방사성 물질을 치워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 군인들이 직접 삽으로 퍼냈다며, 원자력발전소는 인간의 힘으로 관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든의 나이에도 벨라루스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서너 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치고 이튿날 키예프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줄 책이 있다며 다시 집에 들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가니 자신이 체르노빌 수습 과정 때 쓴 일기(책으로 엮었더군요)와 원자력 에너지에 관해 쓴 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체르노빌과 원자력의 실체에 대해 많이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지난해 일본에서 초청을 받았는데 미리 가서 경고하지 못한 게 아쉽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일본에게 책임이 있다. 재생에너지를 개발하고 확산시킬 힘이 있는 나라인데, 지진과 쓰나미가 자주 나는 곳에 원전을 지은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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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원전 운영통제실에서 근무했던 화가 올렉시 브레우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만난 화가 올렉시 브레우스입니다. 모스크바에서 원자력을 전공하고 체르노빌로 내려와 4호기 운영통제실에서 근무했습니다. 운영통제실은 원자로의 모든 상황을 제어 관리하는 곳이죠. 원전 폭발로 이어졌던 실험을 주도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사고 직후 나섰는데 방사능 노출량이 많아서 사흘 만에 원전을 떠났고 그 뒤로 기자를 거쳐 지금은 환경미술집단인 ‘스트론튬90’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집에서 나오는데, 자신이 옛 소련의 문서를 입수했다며 한 가지를 보여주더군요. 그가 체르노빌에서 일할 때 찍은 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했습니다.
체르노빌, 민스크, 키예프/글 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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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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