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홍도 평야는 기러기의 땅이었다
조선시대부터 '갈대밭 떨어지는 기러기 무리' 절경 꼽아
높이 날면서 더러운 곳에 머물지 않는 기러기,자연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땅을 원한다
어릴 적 홍도평과 하천에서 뛰어놀던 생각이 난다. 하천에서 개흙을 비누 삼아 몸에 바르고 미역 감기, 삘기 뽑아 먹기, 물고기 더듬어 잡기, 참게·메뚜기·왕잠자리·쇠똥구리·개구리 잡기, 논에 들어가 짚단 태워 콩 구워 먹기, 벼 이삭 주워 벼 튀겨 먹고 불장난 하기, 철새 따라다니며 쫓기…. 그 시절엔 홍도 평이 놀이터였을 뿐 소중한 자연인 줄은 몰랐다.
▲동트기 전 홍도평
▲ 갈대 숲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홍도평에서 바라 본 김포 시가지.
평야를 바라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데 홍도의 흔적은 사라져 간다. 기러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지난 9월16일 지난해보다 20여 일 이르게 홍도 평야에 수 천 마리의 큰기러기가 어김없이 찾아 왔다.
▲추수한 논에 내려 앉는 큰기러기.
▲아파트 숲 사이로 날아가는 큰기러기 떼.
쇠기러기도 간혹 보이지만 큰기러기만 이곳에 많이 오는 것도 특별한 일이다. 기러기가 일찍 오는 해에는 대체적으로 추위가 빨리 오고 추운 겨울이 오래 지속되곤 한다. 사라지는 홍도 평 개발에 밀려 변화의 바람이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홍도평의 황금 물결
▲랜딩기어를 내리고 착륙 준비를 하는 여객기처럼 발을 세우고 땅에 내릴 준비가 된 큰기러기 무리.
▲해마다 찾아오는 백화현상의 얼룩 큰기러기.
항상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지만, 홍도평을 찾아오는 기러기 모습을 보면 오히려 위안을 받는다. 특히 해를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색다른 큰기러기가 있다. 이름을 '얼룩 기러기'로 지어 주었다. 그 많은 무리 중 모습이 달라 바로 알아 볼 수 있어 무척이나 반갑다.
▲추수
▲홍도평을 흐르는 관정천
▲홍도평을 흐르는 또 다른 하천 계양천.
이른 벼는 몇 군데 베었지만 이제 홍도평야에서는 본격적으로 벼베기가 시작되었다. 주로 늦게 여무는 아키바레 품종의 벼를 심기 때문에 10월 중순께부터 추수를 한다. 비옥하고 드넓은 평야, 한강과 가깝고 관정천과 계양천이 흘러 새들이 좋아하는 지형을 갖추고 있다.
▲추수가 끝난 논에서 큰기러기가 먹이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밥 먹은 뒤엔 털 고르기 시간.
▲산책하는 사람을 보고 긴장하고 있다.
일찍 추수한 논에는 큰기러기 떼가 어김없이 먹이를 먹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다.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뿐, 자동차와 사람의 방해로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먹이를 먹는 일도 그들의 일과이다.
▲비행하다가 방향을 바꾸는 큰기러기의 모습.
▲큰기러기 부부의 비행.
김포시 홍도평은 먼 옛날부터 기러기의 땅이었다. 김포 팔경 중의 하나가 홍도낙안(紅島落雁)이다. 붉을 홍(紅), 섬 도(島), 떨어질 낙 (落), 기러기 안(雁), 곧 ‘홍도에 기러기 내려 앉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여 선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붉은 저녁노을과 함께 무성한 갈대밭의 잠자리로 날아드는 기러기를 상상만 해도 그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해를 박차고 나온 큰기러기.
▲갈대,해, 큰기러기
▲갈대
세월이 흘러 환경은 변했지만 붉은 노을과 갈대, 기러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육지가 되었지만 김포시 북변동, 걸포동, 고촌읍 향산리 3개 지역을 아우르는 곳으로 여의도보다 넓은 기러기 섬이 있었다.
기러기는 외롭고 쓸쓸한 가을을 알리는 철새로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풍요를 채워 주는 가을맞이 전령사 구실을 한다. 갈대, 기러기, 달은 정감 넘치는 가을의 상징이다.
▲옛 지도 소의 홍도평야(오른 쪽 위)(1898년 측도,1911년 제작)
▲달밤에 떠가는 큰기러기
기러기는 가족 사랑이 강하고 가족과 먹이를 함께 먹으며 이동도 함께 한다. 경망스럽지 않고 신중하며 여유로움이 있다. 가족 중 사고를 당하면 좀처럼 그 자리를 뜨지 않는다. 다친 가족을 위해 상처가 아물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례가 종종 관찰된다.
밤하늘을 떠가며 ‘과안~ 과안~’ 울어대는 소리는 깊어가는 가을을 얘기하는 듯하고, 갈대와 황금 벼 이삭과 어우러져 날아드는 모습은 넉넉함을 안겨 준다. 낙엽이 질 무렵 우리나라를 찾아오고 얼음이 풀리면 러시아로 돌아가는 멸종위기야생동식물 2급 큰기러기는 암컷과 수컷이 어두운 갈색과 흰색, 주황색 3가지 색으로 멋을 부리지 않은 단순한 색으로 조화롭고 지루함이 없으며, 무게감과 철학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큰기러기 뒷 모습과 옆 모습.
▲큰기러기의 얼굴.
▲큰기러기 정면 모습. 동료가 먹이를 먹는 동안 망을 보고 있다.
어두운 갈색으로 몸보다 어둡게 보이는 목은 몸보다 길고 앞가슴은 연한 회갈색, 주황색의 다리는 짧아 걸음걸이도 ‘뒤뚱 뒤뚱’ 유난히 하얀 엉덩이는 ‘실룩 실룩’ 거리며 걷는 게 해학적이다. 하지만 깊고 검은 눈엔 웬지 가련한 눈빛이 서려 있다. 자세히 얼굴을 관찰하면 아주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져 매우 순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뒤뚱거리며 걷는 큰기러기.
▲큰기러기의 뒷 모습.
▲무리 지어 앉을 곳을 찾는 큰기러기.
부리는 검지만 중간에 주황색 띠가 선명하고, 날개는 날개 깃 중심은 어두운 갈색이고 가장자리에 흰색 테두리가 있어 마치 물고기의 비늘이 박혀 있는 것 같다. 내려 앉을 때 짧은 꼬리이지만 가장자리 흰 선이 부채 모양으로 활짝 펼쳐져 순박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날개 짓을 멈춘 큰기러기의 정지 동작.
▲돌진하는 큰기러기
▲날아들 때의 모습은 맹금류를 연상케 한다.
▲바람을 다스리는 큰기러기의 기백.
오리류 중 개리와 버금가는 무게 4kg에 길이 87cm 정도의 대형 오리이다. 나는 속도가 빠르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 오르고 내리는 모습과 날개 치는 소리가 ‘쉬익~ 쉬익~’ 힘차게 들린다. 자신만만한 모습과 정면으로 날아들 때의 호랑이 같은 기백은 철새를 대표하는 새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정면을 향해 앉을준비를 하고 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큰기러기.
▲힘찬 날개 짓.
월동 중에는 공동체 생활을 하며 다툼도 없는 편이다. 자리 싸움은 긴 목을 서로 낮추어 앞으로 길게 뻗어 서로 흔들며 힘 과시를 하는 정도이다. 기러기는 한번 짝을 맺으면 헤어지지 않고 암수 중 하나가 죽어도 다시 새 짝을 찾지 않는 다 하여 '믿음 새'라고 부른다.
예부터 기러기는 정절을 지키는 동물로서 혼례식에서도 이용되는데, 신랑이 신부 집에 기러기를 가지고 가는 의식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전통 결혼식에서 목각으로 된 기러기를 올려놓는다.
▲흔히 볼 수 없는 큰기러기의 다툼.
▲앉기 전 큰기러기 뒷 모습. 흰 부채 무늬가 눈에 띈다.
▲달을 스쳐가는 큰기러기
가을에 무리를 지어 찾아오는 새라 하여 ‘추금(秋禽)’, 세상은 잠들고 휘영청 달 밝은 밤, 갈대 숲을 찾아 기러기 떼가 날아드는 광경과 달밤에 떠다니는 새라 하여 ‘삭금(朔禽)’이라고도 한다. 계절이 변하는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여겨져 편지를 ‘雁書(안서)’라 고도했다. 기러기 만큼 많은 이름을 가진 새도 없을 것이다.
▲갈대와 해
▲붉게 물든 하늘과 기러기
한국화에서는 갈대 ‘노(蘆)’와 기러기 ‘안(雁)’을 쓴 노안도(蘆雁圖)에서 저녁 노을의 붉은 해 혹은 달을 그렸다. 노안도에는 다른 사물은 그리지 않는다. 해질 무렵 기러기가 갈대밭 잠자리로 찾아들어 편안하게 쉼을 상징하는 것으로 노안(蘆雁)을 늙은 노(老) 편안할 ‘안(安)’과 같은 의미로 여겨 노후의 안락함을 기원하는 그림으로도 그렸다.
▲평평한 모래 벌에 기러기가 내려 앉는다(平沙落雁). 유강/김병훈 작
안평대군의 회화 수장목록(匪懈堂畵記)에는 안견의 노안도 한 폭이 언급되어 있고 신사임당의 두 그림이 조선시대 노안도 가운데는 가장 시기가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변함없이 화가들이 기러기 그림을 즐겨 그리고 있으며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정겨운 그림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새였음이 분명하다.
▲미확인비행물체 모양의 날개 짓.
▲다급한 비상
지난날 농한기 겨울철에 기러기를 독극물과 엽총으로 사냥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으나 근래 야생동식물 보호법에 의해 포획이 금지돼 평화롭게 살고는 있다. 하지만 위협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홍도평야는 한반도를 찾아오는 큰기러기의 중간 기착지로 이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물고 천수만, 우포늪, 주남저수지 등 우리나라 전역에서에서 월동을 한다.
▲날개 짓을 멈추고 내려 앉기 위해 속도를 줄이는 큰기러기.
▲한 무리가 자리를 잡으면 계속해서 다른 무리들이 날아 앉는다.
▲큰기러기가 내려 앉는 모습.
한강하구에서 월동하는 큰기러기는1만 5000여 마리로 추정된다. 3월이면 번식지로 돌아가는 기러기는 남쪽의 봄소식을 전하며 민가 근처 농경지로 날아들어 더욱 친근감이 있다. 이곳은 수천 년 동안 부모로부터 이어온 학습으로 각인된 그들의 땅이었다.
이 땅을 버리지 않는다면 기러기는 자연과 약속을 지키며 이곳을 변함없이 찾아 올 것이다. 기러기는 높이 날면서 더러운 땅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 곳에선 사람도 살 수 없다. 자연과 함게 한다는 약속을 하는 곳에 기러기가 온다.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V자 편태를 이룬 큰기러기 떼. 양쪽 날개 부분의 길이가 다른 것은 여러 각도에서 볼 때 적으로부터 숫자가 많은 것으로 착시효과를 얻기 위해서이다.
윤순영/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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