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을 사과 따듯 ‘수확’해 먹는 채식주의
<자연과 함께한 1년>
장거리 여행 하는 식품 거부한 먹을 거리 체계 ‘탈출기’
가축은 소농 필수… 비슷해진 음식문화에 ‘내 얘긴데~’
슈퍼에서 제주산 키위와 뉴질랜드산 키위 중 어느 것을 고를까 망설이다가 태평양을 건너 수송하는데 방출된 이산화탄소가 떠올라 제주산을 집었다면 ‘푸드 마일리지’ 개념을 아는 사람이다. 영국의 소비자운동가 팀 랭이 1994년 제안한 이 개념은 ‘산지에서 식탁까지’의 거리가 짧은 농산물일수록 안전하고 환경오염을 줄인다는 내용이다.
집에서 100마일(160㎞) 거리 이내에서 재배되거나 제조한 식품만을 먹자는 ‘100마일 식단’ 운동이나 ‘로컬푸드 운동’도 비슷한 관점에 서 있다. 영국 등 유럽의 일부 나라 슈퍼마켓에는 소비자들이 장거리 수송한 제품을 쉽게 알아보도록 상품에 비행기 모양의 표지를 붙이기도 한다.(물론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한 건 아니다. 제주도 온실에서 바나나를 재배하는 것보다 필리핀 노지에서 기른 바나나를 수입하는 쪽이 이산화탄소를 덜 배출할 수 있다. 또 우리나라 푸드 마일리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칠레산 와인이나 노르웨이산 연어가 아니라 사료, 식용유 등의 원료가 되는 미국산 밀과 옥수수, 그리고 대량으로 수입되는 중국산 식품이다.)
유전자조작·석유로 재배한 옥수수 식품 빼면 식료품 가게는 ‘철물점’
미국의 저명한 환경작가인 바버라 솔버 가족이 지은 <자연과 함께한 1년>(정병선 옮김/한겨레출판/2만5천원)은 이런 로컬푸드를 추구해 한 가족이 벌인 상업적 먹을거리 체계 탈출기이다.
비록 우리와는 다른 문화와 자연 속에서의 체험이지만, 놀랄 만큼 비슷한 점도 많다. 그만큼 우리의 먹을거리 체계는 미국에 접근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의 사막에 건설된 도시에 살던 지은이는 갑자기 편한 삶이 불편해짐을 느낀다. 물과 먹을거리 때문이었다. 골프장의 잔디는 늘 푸르지만 지하수를 너무 퍼낸 나머지 콜로라도강은 바다에 닿지 못하고 모래 평원에서 사라진다. 건조기에 바다로 흐르지 못하는 거대한 강은 황하, 갠지스강, 나일강 등 개도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식료품점의 식품은 대부분 여름휴가 때보다도 먼 거리를 여행한 것들이다. 계절과 관계없이 아무때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게 정상일까. 누가 무얼 넣어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블랙박스 같은 음식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유전자조작 종자와 다량의 석유를 사용해 재배한 옥수수와 대두가 들어간 식품을 뺀다면 식료품 가게는 철물점이 될 것이다. 솔버 가족은 마침내 버지니아주 애팔래치아 산속에 땅 한 뙈기를 얻어 소농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들을“자선의 대상으로 보는” 이웃들 앞에서 새내기 농부들은 토마토와 아스파라거스, 칠면조 등을 기르며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먹을거리를 실현한다. 미국식 먹을거리 체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이들이 몸소 겪으며 제안하는 대안이 얼마나 유쾌하고 쉬운지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익 단체 책에서 미국 체제 전복할 위험 인물로 꼽기도
이 책은 여러 가지 요리법도 소개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일상의 소소한 얘깃거리 속에서 지은이는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고 세계화된 자본에 기대며 결코 안전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현재의 먹을거리 체계가 소규모 가족농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엄청난 얘기를 풀어내고 있다. 한 우익 단체의 책에서 솔버를 미국 체제를 전복할 위험한 인물 100명의 하나로 꼽았다는 얘기를 지은이는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이 책은 채식주의에 대해 매우 융통성 있고 현실적인 시각을 선보인다. 식품의 세계화와 공장식 축산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채식주의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지은이도 기본적으로 채식주의자이다. 그러나 기른 가축의 고기를 먹는다.
솔버 가족은 닭과 칠면조의 병아리를 농가에서 기른다. 정이 들었지만 애완용은 아니다. 방목해 기른 이 가축들은 사과를 따는 것처럼 ‘수확’한다. 기르던 닭의 목을 쳐 피를 빼고 끓는 물에 데쳐 털을 뽑는 행사가 결코 을씨년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유쾌했음을 지은이는 섬세하게 기록한다.
그 논거는 이렇다. 채식이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환상이다. 채소나 감자를 재배하려면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곤충과 벌레를 죽인다. 같은 칼로리의 식품을 생산하는 데 고기는 식물보다 열 배는 넓은 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옥한 농지의 사례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몽골, 칼라하리, 스칸디나비아 북부 등 황무지에 사는 원주민은 가축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 그곳의 억센 식물을 먹을거리로 만드는 방법은 가축사육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비탈의 작은 땅에 난 잡초를 먹이로 삼아 값진 비료를 생산하는 가축을 기르는 것은 소농의 필수라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다 죽은 가축이라면 그 고기를 먹는 게 무슨 문제냐고 지은이는 묻는다. 나아가 “지구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채식주의는 사치다”라고 단언한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장거리 여행 하는 식품 거부한 먹을 거리 체계 ‘탈출기’
가축은 소농 필수… 비슷해진 음식문화에 ‘내 얘긴데~’

집에서 100마일(160㎞) 거리 이내에서 재배되거나 제조한 식품만을 먹자는 ‘100마일 식단’ 운동이나 ‘로컬푸드 운동’도 비슷한 관점에 서 있다. 영국 등 유럽의 일부 나라 슈퍼마켓에는 소비자들이 장거리 수송한 제품을 쉽게 알아보도록 상품에 비행기 모양의 표지를 붙이기도 한다.(물론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한 건 아니다. 제주도 온실에서 바나나를 재배하는 것보다 필리핀 노지에서 기른 바나나를 수입하는 쪽이 이산화탄소를 덜 배출할 수 있다. 또 우리나라 푸드 마일리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칠레산 와인이나 노르웨이산 연어가 아니라 사료, 식용유 등의 원료가 되는 미국산 밀과 옥수수, 그리고 대량으로 수입되는 중국산 식품이다.)
유전자조작·석유로 재배한 옥수수 식품 빼면 식료품 가게는 ‘철물점’
미국의 저명한 환경작가인 바버라 솔버 가족이 지은 <자연과 함께한 1년>(정병선 옮김/한겨레출판/2만5천원)은 이런 로컬푸드를 추구해 한 가족이 벌인 상업적 먹을거리 체계 탈출기이다.
비록 우리와는 다른 문화와 자연 속에서의 체험이지만, 놀랄 만큼 비슷한 점도 많다. 그만큼 우리의 먹을거리 체계는 미국에 접근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의 사막에 건설된 도시에 살던 지은이는 갑자기 편한 삶이 불편해짐을 느낀다. 물과 먹을거리 때문이었다. 골프장의 잔디는 늘 푸르지만 지하수를 너무 퍼낸 나머지 콜로라도강은 바다에 닿지 못하고 모래 평원에서 사라진다. 건조기에 바다로 흐르지 못하는 거대한 강은 황하, 갠지스강, 나일강 등 개도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식료품점의 식품은 대부분 여름휴가 때보다도 먼 거리를 여행한 것들이다. 계절과 관계없이 아무때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게 정상일까. 누가 무얼 넣어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블랙박스 같은 음식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유전자조작 종자와 다량의 석유를 사용해 재배한 옥수수와 대두가 들어간 식품을 뺀다면 식료품 가게는 철물점이 될 것이다. 솔버 가족은 마침내 버지니아주 애팔래치아 산속에 땅 한 뙈기를 얻어 소농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들을“자선의 대상으로 보는” 이웃들 앞에서 새내기 농부들은 토마토와 아스파라거스, 칠면조 등을 기르며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먹을거리를 실현한다. 미국식 먹을거리 체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이들이 몸소 겪으며 제안하는 대안이 얼마나 유쾌하고 쉬운지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익 단체 책에서 미국 체제 전복할 위험 인물로 꼽기도
이 책은 여러 가지 요리법도 소개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일상의 소소한 얘깃거리 속에서 지은이는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고 세계화된 자본에 기대며 결코 안전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현재의 먹을거리 체계가 소규모 가족농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엄청난 얘기를 풀어내고 있다. 한 우익 단체의 책에서 솔버를 미국 체제를 전복할 위험한 인물 100명의 하나로 꼽았다는 얘기를 지은이는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이 책은 채식주의에 대해 매우 융통성 있고 현실적인 시각을 선보인다. 식품의 세계화와 공장식 축산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채식주의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지은이도 기본적으로 채식주의자이다. 그러나 기른 가축의 고기를 먹는다.
솔버 가족은 닭과 칠면조의 병아리를 농가에서 기른다. 정이 들었지만 애완용은 아니다. 방목해 기른 이 가축들은 사과를 따는 것처럼 ‘수확’한다. 기르던 닭의 목을 쳐 피를 빼고 끓는 물에 데쳐 털을 뽑는 행사가 결코 을씨년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유쾌했음을 지은이는 섬세하게 기록한다.
그 논거는 이렇다. 채식이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환상이다. 채소나 감자를 재배하려면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곤충과 벌레를 죽인다. 같은 칼로리의 식품을 생산하는 데 고기는 식물보다 열 배는 넓은 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옥한 농지의 사례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몽골, 칼라하리, 스칸디나비아 북부 등 황무지에 사는 원주민은 가축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 그곳의 억센 식물을 먹을거리로 만드는 방법은 가축사육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비탈의 작은 땅에 난 잡초를 먹이로 삼아 값진 비료를 생산하는 가축을 기르는 것은 소농의 필수라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다 죽은 가축이라면 그 고기를 먹는 게 무슨 문제냐고 지은이는 묻는다. 나아가 “지구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채식주의는 사치다”라고 단언한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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