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그 바다와 고기를 찾아서

황선도 2015. 0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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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산티아고의 실존인물 그레고리오 후엔테스 104세 타계

헤밍웨이 집필실 호텔에 보존, 말레콘 저 멀리 새치 어장 아련히

 

NOAA - Gardieff S_Atlantic_blue_marlin.jpg »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가 쪽배를 타고 2박3일 동안 사투를 벌여 잡은 물고기인 대서양녹새치. 사진=미국립해양대기국, Gardieff S, 위키미디어 코먼스

 

2004년 난생처음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미국 서부 샌디에이고 근처의 라 호야(La Jolla)에 있는 미국립해양대기국(NOAA)에 딸린 남서수산과학센터(SFSC)에 일하러 갔다.
 
미국 최고의 해양 휴양도시로 알려진 라 호야는 ‘보석’이란 뜻이란다. 내게도 이 도시명의 발음 때문에 보석 같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박사학위 심사 발표할 때이다. 내 논문은 고등어에 대한 연구이었는데, 미국 서부 해안은 고등어 주요 서식지로 이 지역에서 연구된 고등어 논문이 많아 인용문헌으로 참고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명이 스페인어인 줄 몰랐던 내가 제 발음인 ‘라 호야’가 아닌 영어식으로 ‘라 졸라’라고 했다가 한 심사자에게 ‘졸라’ 창피당했다. 어쨌든 한국 고등어 박사가 미국 고등어의 본 고장으로 미국 고등어를 만나러 침투했던 것이다.
   
연구소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이석(耳石) 처리 방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이 분야 전문가인 커트 쉐퍼(Kurt Schaefer) 박사를 소개받았다. 마침 논문에서만 본 연구자라 만나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다가 그가 수산자원학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잉여 생산량 모형인 쉐퍼 모델(Schaefer model)을 만든 그 쉐퍼(M. Schaefer)의 아들이란다. 책으로 봤던 저자를 직접 만난 것보다 더 신기했다.

ma1.jpg » 커트 쉐퍼 박사(왼쪽)과 나(가운데).

 

커트는 전미 열대 다랑어 위원회(IATTC)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의 연구실 벽에는 다랑어 관련 자료와 사진이 많이 붙여 있었다.
 
여러 다랑어 종류와 어획하는 사진, 그리고 서식분포 그림. 그런데 그중에 연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듯한 사진이 있었다.
 
웬 노인이 시가에 불을 붙이고 있는 사진이 눈에 띄었다. 무슨 연유로 이런 사진을 벽에 붙여놨느냐고 물어봤더니, 그 사람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의 실존인물인 그레고리오 후엔테스라면서 얼마 전에 104세로 사망한 기사의 사진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ma2.jpg » 다랑어 관련 사진과 자료.

Toirelb_TheOldManGregorioFuentes.jpg »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의 실존인물인 그레고리오 후엔테스의 100살 생일 때의 모습. 사진=Toirelb, 위키미디어 코먼스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억세게 운 없는 노인이 85일째 쪽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5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를 2박3일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잡았다는 그놈이 바로 ‘대서양녹새치(Blue marlin, Makaira nigricans)’이다.
 
‘새치’라 부르는 이 대형어는 다랑어와 함께 외양성 어류의 대표 주자로 위턱과 아래턱이 뾰족하며, 특히 위턱이 아래턱보다 훨씬 길게 장검처럼 튀어나온 것이 특징이다.

 

이런 새치류에는 황새치(Swordfish, Xiphias gladius), 돛새치(Indo-Pacific sailfish, Istiophorus platypterus), 녹새치(Indo-Pacpfic blue marlin, Makaira mazara), 흑새치(Black marlin, Istiompax indica, 백새치로 잘못불리기도 함), 청새치(Striped marlin, Kajikia audax) 등이 지역에 따라 분포한다.
 

dominic sherony _White_Marlin_in_North_Carolina_1394318584_s.jpg » 낚시바늘을 털어내기 위해 물위로 뛰어오르는 흑새치. 사진=dominic sherony,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럼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썼던 배경은 어디이고, 녹새치를 잡았던 그 바다는 어디일까? 과학자는 늘 궁금하다.
 
결국 이듬해인 2005년 11월, 마침내 나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찾아 나섰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쿠바에 입성하여 처음 접한 단어가 공항에 붙은 이름 ‘호세 마르티’이다.
 
쿠바 하면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만 알았는데, 의외의 인물이 또 있었다. 그는 작가이며, 사상가인 쿠바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이후 여행중에 발견한 사실이지만, 피델의 동상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호세의 동상과 이름은 쿠바 곳곳 어디에나 존재하며 지금도 인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2015년, 이제는 쿠바가 미국과 수교를 했으니 곧 여러 상황이 바뀌겠지만, 10년전인 2005년 당시만 해도 쿠바에 입국할 때는 낯선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입국 비자를 대사관에서 받는 것이 아니고, 쿠바행 비행기 안에서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출입국신고서 같은 것인데, 이것으로 출입국심사를 하고 여기에 스탬프를 찍어줌으로써 여권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미국의 바로 코밑에서 적대국으로 남아있는 쿠바로서는 여행자들이 미국 입국하는데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동시에 관광비자를 돈을 받고 팔면서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려는 고도의 상술도 포함되어 있으니 훌륭하잖은가.

 

ma3.jpg » 여권과 쿠바 비자를 대신하는 출입국심사서.
 
혁명의 상징으로 만든 것이 혁명광장, 플라자 데 레볼루시온이다. 피델이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하는 사진이 바로 이곳 광장이다. 이곳에는 아바나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혁명탑과 그 입구에 호세 마르티의 동상과 박물관이 있다.

 

ma7.jpg » 쿠바 아바나에 있는 혁명광장.

 
숙소 옆에 있는 호텔 냐시오날 데 쿠바는 바다와 말레콘이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유서 깊은 호텔로 고풍스런 유럽양식의 건물에 열대식물로 정원이 잘 단장되어 있었다. 이 호텔에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공연하는 살롱이 있어 더 유명하다.
 
부에나비스타 클럽 공연은 호텔 특별 살롱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 9시에 공연되는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때론 열정적이고, 때론 애잔하기까지 한 음악과 춤….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유일한 오리지널 멤버 피오가 노래를 부를 때는 홀로 서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그들의 음악은 생기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ma4.jpg »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공연하는 살롱 있는 호텔 나시오날 데 쿠바.

 
쿠바는 서방 세계, 특히 미국의 시각으로 보면 위험하고 못사는 나라지만, 또 다른 눈으로 보면 오히려 서방 세계가 넘치는 것이지, 쿠바가 부족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설령 부족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의 얼굴에서 찌든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낙천적이었고, 삶을 즐기고 있었고, 자존심이 있었고, 아름다웠다. 개인적으로 세계 어디를 가나 특정 나라 사람들이 판을 치는 것을 많이 보았던 내 눈에는 그들이 제외된 이곳 쿠바에서는 여행자가 다 평등했다. 그래서, 쿠바는 전혀 달랐다.

 

아바나에는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다는 호텔 방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암보스 문도 호텔 511호, 입장료가 있어 문짝만 바라보고 돌아섰다. 지금 후회된다.
 
헤밍웨이가 쿠바 전통술인 모히토를 즐겼다는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 카페, 이곳에서는 한잔 주문했다. 술이니까. 아직도 아바나에는 헤밍웨이가 살아 있다.

ma5.jpg » 보데기타 델 메디오 카페.  
 
<노인과 바다>의 주 무대인 바다를 찾아가다가 만난 곳이 말레콘이다. 우리네 눈으로 보면 도심 바닷가에 만들어진 방파제일 뿐이다. 아마 바닷가에 도로를 만들려고 해안 공사를 한 것일 것이다.
 
8킬로미터나 되는 말레콘은 단순한 방파제 구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바나 사람들의 생활의 일부였다. 뜨거운 여름 한낮에는 아이들의 천연 수영장 테라스로, 배고픈 자들에게는 낚시터, 에어컨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연풍을 쐴 수 있는 휴식장소로 제공된다.

 

ma6.jpg » 말레콘. 건너편 먼바다에 다랑어 어장이 있다.
 
밤이 되면 말레콘은 또 다른 장소가 된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의 공공연한 연애장소가 되어준다. 밀애의 장소가 아니라, 떳떳하게 키스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배고픈 악사에게는 밤바다를 배경으로 기타 반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바나 시민들의 삶의 일부가 된 것은 그들의 생활 터전과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레콘 저 멀리 어디인가에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가 대서양녹새치를 잡았던 어장이 아련하게 보이는 듯하다. 플로리다 해협으로 흐르는 멕시코만류!

 

dominic sherony _1935_Hemingway_and_Marlins.jpg » 헤밍웨이 일가가 1935년 낚시로 잡은 새치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Ernest_Hemingway_and_Henry_Strater,_Bahamas,_1935.jpg » 1935년 헤밍웨이는 동료 헨리 스트레이터와 함께 거대한 대서양녹새치를 낚았지만 몰려든 상어 때문에 절반 가량을 뜯긴 채 귀항했다. 이 경험이 <노인과 바다>의 주요 줄거리가 됐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다음 편으로 이어짐)

 

글·사진 황선도/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연구위원, <한겨레> 물바람숲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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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도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연구위원·어류학 박사
고등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어류생태학자.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에서 자원조성 업무를 맡고 있다. 뱀장어, 강하구 보전,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수산자원 회복 등에 관심이 많다.
이메일 : sanisdhw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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