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 속 이끼, 400년 만에 ‘부활’

조홍섭 2013.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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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북극 섬 이끼식물, 기후변화로 빙하 녹자 되살아나

빙하 오면 식물 죽는다 통념 뒤집어…이끼, 줄기세포처럼 만능분화 능력

 

moss2.jpg » 캐나다 북극의 '눈물방울' 빙하 전경. 네모 안은 빙하가 물러난 곳에서 자라기 시작한 이끼. 사진=라파즈 외 PNAS

 

한라산 정상의 절벽에는 다음달 초쯤 세계적으로 귀한 식물이 꽃을 피운다. ‘바위 매화’란 뜻의 암매가 바위에 바짝 붙은 자세로 커다란 연노랑 꽃망울을 터뜨린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무의 하나인 암매는 북한에도 없는 북방계 식물로 사할린 등 추운 곳에만 산다. 그 식물이 한라산에 살게 된 데는 빙하기의 영향이 작용했을 것이다. 빙하기가 끝나 추운 날씨가 물러가면서 북방계 식물은 북쪽이나 고산지대로 생육지를 옮기지 못하면 도태됐을 것이다.
 

한반도가 직접 빙하로 덮인 적은 없지만 ‘빙하기 피난처’는 있었던 셈이다. 빙하가 덮치지 않거나 빙하 위로 머리를 내민 ‘피난처’는 모든 식물이 죽어버리는 빙하지역과 판이한 식물 생태를 보인다. 그런데 빙하 속에서도 살아남는 식물이 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이 식물은 얼음 속에서 400년 동안이나 갇혀있었으면서 얼음이 녹자마자 싹을 틔우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였다.
 

캐나다 앨버타 대학 연구진은 <미 국립학술원회보(PNAS)> 온라인판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그린란드 서쪽 캐나다 북극 섬지역에서 선태식물(이끼류)을 관찰하고 실험한 결과를 보고했다.
 

reviv1-1.jpg » 캐나다 북극의 연구장소(왼쪽 붉은 화살표). 오른쪽이 눈물방울 빙하. 빙하 가장자리 주변보다 옅은 색깔이 최근 빙하가 후퇴한 부분을 가리킨다. 사진=라파즈 외, PNAS  

 

연구진은 엘스미어 섬의 눈물방울 빙하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는데, 이곳은 2004년 이후 빙하가 급속하게 후퇴하고 있는 곳이다. 얼음이 녹으면서 녹은 지역엔 새로운 식물이 자라났는데, 연구진이 주목한 것은 얼음 속에서 누렇게 말라 죽어있던 식물이었다.
 

이 식물 사체의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약 400년 전 북반구를 뒤덮었던 소빙기(1550~1850년) 때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식물의 일부는 얼음이 녹자마자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연구진은 얼음 속에서 말라붙은 이끼의 줄기와 잎을 갈아 화분에 심고 물을 주었더니 거뜬히 살아났고, 빙하에서 59㎝ 떨어진 곳에 심었을 때도 이끼는 문제없이 자랐다고 밝혔다.

 

reviv4.jpg » 소빙기 빙하가 물러나면서 드러난 빙하 밑 선태식물. 아래 사진은 위를 확대한 것이다. 줄기와 잎이 멀쩡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진=라파즈, PNAS
 

reviv2.jpg » 소빙기 빙하가 녹은 뒤 드러난 선태식물이 명백하게 되살아나 자라났음을 보여준다. 사진=라파즈, PNAS

 

reviv3.jpg » 빙하에서 드러난 선태식물의 사체를 갈아 실험실 화분에 심었더니 성공적으로 재생한 각종 이끼류 모습. 사진=라파즈, PNAS  

 

이제까지 두터운 빙하에 덮이면 모든 식물이 죽는 것으로 알려졌고, 일부 선태식물은 식물은 죽지만 땅에 떨어진 포자에서 다시 싹이 트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번 연구로 빙하 속에서도 선태식물은 살아남아 복원 기회를 기다린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연구진은 이것을 선태식물의 ‘분화 전능성’으로 설명했다. 마치 복제기술로 만능 분화능력을 지닌 줄기세포를 만들 듯이, 선태식물의 분화된 세포라도 역분화를 통해 다시 새로운 세포로 거듭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논문은 “선태식물의 이런 놀라운 복원력은 극단적인 극지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했음을 보여준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로 빙하 후퇴로 인한 극지 경관에서 선태식물이 차지하는 구실을 새로 이해할 수 있으며, ‘빙하기 피난처’의 개념도 확장할 수 있을 것으로 연구진은 기대했다.
 

선태식물은 우리가 흔히 보는 고등식물이나 양치류와 달리 진정한 뿌리나 줄기, 잎, 물관 등이 없는 원시적 형태의 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우산이끼 등 500여 종의 선태식물이 있다.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Regeneration of Little Ice Age bryophytes emerging from a polar glacier with implications of totipotency in extreme environments
Catherine La Farge, Krista H. Williams, and John H. England

PNAS
www.pnas.org/cgi/doi/10.1073/pnas.1304199110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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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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