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에 10㎝, 황제펭귄의 겨울나기

조홍섭 2012. 11. 30
조회수 40394 추천수 0

남극 겨울 혹한 집단적 '체온 나누기'로 버텨…원동력은 각자의 이기주의 밝혀져

바람 등지고 기왓장처럼 밀착, 간헐적 이동이 파동처럼 무리 전체에 퍼져 

 

호주 환경부1.jpg » 서로 체온을 나누며 혹한을 견디는 어린 황제펭귄. 사진=오스트레일리아 환경부

 

수족관의 물고기가 떼지어 헤엄치고 갯벌의 도요새가 무리지어 나는 모습은 놀랍다. 그 많은 개체가 서로 부딪히거나 우왕좌왕하지 않고 일제히 방향을 바꾸는 모습은 장관이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누군가 명령을 내리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일사불란한 집단행동의 비결은 무리에 속한 각자의 행동이 합쳐진 것일 뿐이다. 무리 속의 각 개체는 아주 단순한 규칙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이를테면 “옆 친구가 멀어지면 따라잡고, 너무 가까워지면 속도를 늦춰라”라는 규칙에 충실하기만 해도 무리 전체로는 멋진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고속도로에서 앞차와 간격을 유지하며 자동차를 운전하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01236668_P_0.jpg » 금강 하구의 가창오리가 군무를 하는 모습. 사진=군산시

 

남극의 황제펭귄의 무리 행동은 물고기나 새와는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이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들도 다른 무리 동물처럼 간단한 규칙을 따르며, 그 결과로 ‘열 평등’이란 값진 결과를 얻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극한 환경이 펼쳐지는 남극의 겨울 동안 번식을 하는 황제펭귄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무리를 짓는다. 영하 45도에 이르는 혹한과 초속 50m의 강풍이 몰아치는 얼음판 위에서 수컷 황제펭귄은 발 위에 알을 올려놓은 채 새끼가 태어나고 암컷이 찾아올 때까지 넉 달 가까운 밤을 버텨야 한다.
 

펭귄이 얼어 죽지 않기 위한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몸을 밀착시켜 무리를 짓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쪽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 기왓장처럼 몸을 붙이면 무리 안의 온도는 20도에 이르고 때론 37.5도까지 치솟는다.
 

호주 환경부_프레데리케 올리비에 - 복사본.jpg » 남극의 블리저드에 맞서 몸을 밀착해 추위를 이기는 황제펭귄 수컷들. 사진=오스트레일리아 환경부

 

문제는 무리의 가장자리, 특히 바람맞이 펭귄들이 찬 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혹한에서 넉 달을 버티는 수컷 황제펭귄이니만큼 “온기를 나누세. 바깥에서 고생했으니 이제 자리를 바꾸지” 하는 배려쯤은 어려울 것도 없겠다.
 

실제로 현장 연구를 보면, 펭귄들은 무리의 온기를 골고루 나눈다. 펭귄 무리는 미동도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30~60초마다 5~10㎝씩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은 파동처럼 무리 중심을 향해 초속 12㎝의 속도로 번져간다. 파동이 멎으면 무리의 움직임도 멎는다. 개별 펭귄은 주위 펭귄과 위치가 크게 달라지지 않으며, 억지로 파고들거나 밀려나는 개체도 없다. 아주 걸쭉한 유체처럼 무리는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서서히 이동하며, 그 과정에서 무리 가장자리와 안쪽 개체의 위치가 달라진다.
 

 호주 환경부_글렌 브로우닝1.jpg » 바람에 등에 노출된 개체는 열 손실이 가장 많지만 차츰 무리 안쪽으로 이동한다. 사진=오스트레일리아 환경부

 

최근 미국의 한 수학자는 수학모델로 이런 황제펭귄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연구자들은 펭귄이 오로지 자신의 열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가정했다. 그런데도 이 모델 속 펭귄 무리는 실제 펭귄 무리와 비슷한 형태와 움직임을 보였고, 놀랍게도 무리의 열을 공평하게 나눴다.
 

각자가 자기 이익을 좇아도 전체가 평등하다는 ‘펭귄 모델’은 구성원 모두가 어려움을 피하지 않아야만 이상적으로 작동한다. 벽과 같은 장애물이 있어 일부만 그것을 이용한다면 평등 시스템은 곧 깨지고 만다.
 

penguin - 복사본.jpg » 힘든 겨울나기가 끝나고 그 사이 태어난 수컷을 품고 있는 황제펭귄. 사진=영국 남극 조사대(BAS)

 

중·고등학교 때 추운 겨울날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던 생각이 난다. 만일 반별로 모이지 않도록 했다면 학생들은 황제펭귄처럼 무리를 짓고 슬금슬금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Waters A, Blanchette F, Kim AD (2012) Modeling Huddling Penguins. PLoS ONE 7(11): e50277. doi:10.1371/journal.pone.0050277

Zitterbart DP, Wienecke B, Butler JP, Fabry B (2011) Coordinated Movements Prevent Jamming in an Emperor Penguin Huddle. PLoS ONE 6(6): e20260. doi:10.1371/journal.pone.0020260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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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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