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뻑 젖은 춘분…배 홀쭉한 꿀벌은 복수초와 상견례

이강운 2019. 03. 21
조회수 54909 추천수 0
춘분 맞은 식물과 곤충, 봄바람 맞고 '꿈틀'

sp0.jpg » 봄볕에 가장 먼저 피는 야생화의 하나인 복수초에 꿀벌이 찾아들었다.

멀리 남녘엔 하얀 매화, 벚꽃이 만개해 봄을 부르고, 달콤한 봄비가 내린다는데 이틀 전 강원도 횡성 연구소는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렸다. 어물쩡하게 지나가려는 봄의 정취를 춘설로 흠뻑 달래고도 남을 만큼 반가웠다. 겨울 내내 가물어서 팍팍해진 땅을 축축하게 적셔주어 고마웠고, 때마침 할아버지 집에 놀러온 손녀의 눈 속에 듬뿍 담긴 하얀 눈꽃을 보니 더욱 좋았다. 주변에서 '손녀 바보'라고 놀리지만 바보여서 좋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고 새끼 하나만을 위하는 그 마음을 즐긴다.

sp1.jpg » 춘분을 앞두고 내린 눈꽃을 손녀 혜랑과 함께 구경했다.

잔설과 얼음으로 얼핏 보기엔 아직 겨울이지만 훈훈한 바람소리가 좀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다. 낮과 밤 길이가 같아져 충분한 햇볕을 받고 초록 기운 가득한 봄바람을 맞아 녹색의 잎을 만들고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절기. 오늘은 춘분.

sp2.jpg » 연구소 연못에는 아직 눈과 얼음이 남아있다.

갈색 빛의 겨울 허물을 훌훌 털어버리고 녹색의 싹이 올라온다. 이른 봄이면 인터넷에 가장 먼저 사진이 올라오는 복수초가 봄 눈 녹은 자리에서 이제야 꽃을 피웠다. 꽃에 곤충은 잘 어울리는 궁합. 먹지 못해 속이 텅 비어 배가 홀쭉한 꿀벌이 복수초와 상견례를 하고 열심히 양식을 모으고 있다. 

가지들이 시원시원하게 죽죽 뻗은 모습을 본 따 붙여진 이름, 우리말 ‘벋다’에서 유래한 버드나무의 꽃눈에 물이 올랐다. 물을 잔뜩 머금고 부풀어 올라 부드러운 솜털 같은 버들가지 꽃눈에 꿀벌이 대롱대롱 매달려 아직 덜 여문 꿀을 짜내고 있는 것 같다. 

sp4.jpg » 버드나무 꽃눈에 꿀벌이 매달렸다.

작지만 비행술이 뛰어난 깔다구는 노란 꽃가루를 듬뿍 묻힌 일찍 개화한 버들강아지 수술머리에서 한창 꿀을 빨고 있다. 계절을 준비해온 식물과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식물 리듬에 따라가는 곤충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들어 간다.

sp5.jpg » 작은 깔다구 한 마리가 버들강아지 수술머리에서 꿀을 빨고 있다.

독성 때문에 사람들은 식용할 수 없지만 모시나비 애벌레에겐 보물주머니인 산괴불주머니가 막 꽃을 피우고 있다. 같은 모시나비 속(屬)이면서도 붉은점모시나비는 기린초만을 고집한다. 같은 집안 내에서도 이렇게 식성도 다르고 생활사를 달리하는 참 까다로운 놈들이다. 황새냉이도 이미 꽃을 피웠으니 십자화과 식물을 먹는 흰나비 애벌레도 곧 나오겠지. 봄바람에 흔들리는 녹색의 잎과 꽃은 벌레들을 꿈틀거리게 한다.

sp6.jpg » 산괴불주머니

sp7.jpg » 기린초

sp8.jpg » 황새냉이

한반도 고유종 식물인 히어리는 꽃망울이 터지기 직전이고 겨울을 잘 버틴 나비들이 나풀나풀  하늘을 날고, 땅위에서도 개미들의 행렬이 바쁘다. 하루 종일 호르륵 호르륵 산개구리 합창이 산속 연구소에 울려 퍼진다. 산을 타고 봄이 내려오면서 산 밑 연못에는 짝짓기를 마친 산개구리가 무더기로 알을 낳았다. 생명의 기운이 넘쳐 몸속까지 환해진다.

sp9.jpg » 히어리

sp10.jpg » 산개구리가 연못에 알을 낳았다.

혹한의 눈보라와 한밤의 서릿발을 잘 참아낸 곤충들이 화려한 봄을 맞고 있다. 어른벌레로 월동했던 묵은실잠자리도 잘 버텼고, 번데기로 겨울을 났던 금빛겨울가지나방은 날개를 달고 어른벌레가 되었다. 알로 월동했던 벚나무까마귀부전나비는 껍질을 깨고 첫 번째 애벌레 시절을 시작했다.

sp11.jpg » 어른벌레로 겨울을 난 묵은실잠자리.

sp12.jpg » 번데기 상태로 겨울을 난 금빛겨울가지나방 암컷이 어른벌레가 됐다.

sp13.jpg » 벚나까마귀부전나비의 월동 알.

sp14.jpg » 벚나무까마귀부전나비의 1령 애벌레.

금속광택 빛나는 청록색 날개를 가진 금강산녹색부전나비는 알로 겨울을 나고 있다. 수려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서 최초의 멋진 이름을 얻은 금강산녹색부전나비가 온 세상을 향해 날갯짓을 하면 꿈에도 그리는 통일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나비 효과로.

sp15.jpg » 겨울을 난 금강산녹색부전나비의 알.

sp16.jpg » 금강산녹색부전나비

중국과 러시아 국경 지역인, 한반도 최북단 두만강에 인접한 함경북도 회령의 지명을 딴 회령푸른부전나비 월동 알도 아직 겨울이다. 함경북도 회령의 지명을 갖고 있어 이름 자체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종이지만 강원도 영월에서도 ‘가침박달’이라는 식물을 먹으며 잘 살고 있다.

sp17.jpg » 회령푸른부전나비의 월동 알

sp18.jpg » 회령푸른부전나비

아직 기록이 없는 북한의 벌레들을 발굴하고, 기록하고, 기억할 수 있으면 얼마나 가슴 벅차는 일일까! 그 날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사진/ 이강운 홀로세 생태보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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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한국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국립안동대학교 식물의학과 겸임교수. 저서로는 <한국의 나방 애벌레 도감(Caterpillars of Moths in Korea)>(2015.11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캐터필러>(2016.11 도서출판 홀로세)가 있다.
이메일 : holoce@hecri.re.kr      
블로그 : http://m.blog.naver.com/holoce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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