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 오징어의 이유 있는 ‘무차별 섹스’ 밝혀져

조홍섭 2011.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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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심해서 홀로 생활, 암수 가리려다 짝짓기 아예 못해

‘빨리 살고 일찍 죽는’ 연체동물의 생존전략, 영국 왕립협회 학술지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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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캐년에 서식하는 심해 오징어. 출처=몬테레이 베이 수족관 연구소.

 

차고 캄캄한 깊은 바닷속 생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미스터리에 가득 찬 심해 생물의 생식 행동에 관한 주목할 관찰 결과가 보고됐다. 그 주인공은 깊은 바다 생태계에서 핵심 구실을 하는 심해 오징어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몬터레이 베이 수족관 연구소의 해양 생물학자인 헨드릭 호빙 등 미국 연구자들은 국제학술지 <바이올로지 레터스>에 실린 논문에서 심해 오징어의 생식 행동을 직접 관찰한 결과를 보고했다.
 

영국 왕립학회가 발간하는 이 학회지에 실린 논문 제목은 “어둠 속의 발사: 심해 오징어의 동성 섹스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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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 오징어 피부에 박혀있는 정자 주머니(a). 정자 주머니는 길이 1.5㎜로 꼬리가 달려있는 모습이다(b). 정자 주머니가 달려있는 모습을 확대한 것(c, d). 출처=<바이올로지 레터스>

 

연구진은 원격 조정 잠수정을 이용해 캘리포니아의 수심 400~800m 바닷속에 서식하는 오징어를 지난 20년 가까이 관찰했다. 이들은 108마리의 희귀한 심해 오징어를 촬영할 수 있었는데, 이 가운데 성체 39마리의 암수를 가려낼 수 있었다.
  

이들 39마리 가운데 19마리는 암컷, 20마리는 수컷이었다. 이 오징어의 성비는 대체로 1:1이어서 관찰대상은 자연 상태의 오징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심해 오징어의 짝짓기는 수컷이 정자가 든 주머니를 생식기를 이용해 암컷의 몸 표면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조사 결과 놀랍게도 10마리의 암컷과 함께 9마리의 수컷에서도 정자 주머니가 관찰됐다. 수컷이 암컷과 같은 빈도로 다른 수컷과 짝짓기를 시도한다는 증거였다.
 

정자 주머니는 길이 1.5㎜, 폭 0.8㎜의 크기로 오징어의 등이나 지느러미 근처 피부에 부착되는데, 정자는 암컷의 몸 속으로 방출되며 빈 주머니가 한 동안 피부에 남게 된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이 오징어의 발에는 발광기관이 달려있어 짝짓기 상대를 찾는데 쓸 수 있지만 실제로 이용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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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4m 깊이에서 찍은 암컷 심해 오징어 사진. 원은 정자 주머니이다. 출처=몬테레이 베이 수족관 연구소.

 

그렇다면 이 심해 오징어는 왜 아무 소용 없는 동성 짝짓기에 아까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됐을까.
 

연구진은 우선 이 오징어가 홀로 생활하며 매우 드물어 서로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 주목했다. 게다가 암컷과 수컷은 크기와 생긴 모습도 비슷하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짝을 기다리느니 눈에 띄는 대로 짝짓기를 시도하는 편이 유리할 터이다.
 

다른 오징어와 마찬가지로 이 오징어는 일 년에 단 한 번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짝짓기를 하고 죽는다.
 

논문은 “짧은 수명과 짝짓기 기간 동안 수컷은 암·수 모두를 가리지 않고 짝짓기를 하는 것이 성공률을 극대화하는 생식전략임을 진화를 통해 체득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예 짝짓기를 못하는 것보다는 동성 짝짓기에 들이는 비용이 적게 먹히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암컷과 수컷의 구별과 짝짓기 의식을 개발하는 비용이 훨씬 더 든다는 것이다. 논문은 이것을 ‘빨리 살고 일찍 죽는’ 연체동물의 생존전략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밝혔다.
 

한편, 또 다른 심해 오징어인 대왕오징어에서도 수컷의 몸에 박힌 정자 주머니가 관찰된 적이 있지만, 이것이 동성 짝짓기의 결과인지는 불확실하다고 이 논문은 밝혔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 몬테레이 베이 수족관 연구소가 촬영한 몬테레이 캐년의 다양한 심해 오징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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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기자
20년 넘게 환경문제를 다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전문기자를 역임했으며 웹진 물바람숲의 운영자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과학기술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네이버에 <한반도 자연사>를 연재했고 교육방송(EBS)의 <하나뿐인 지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메일 : ecothink@hani.co.kr       트위터 : eco_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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