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동토 밑에 ‘인류 미래’ 보관하는 종자 저장소

2011.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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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억 점 길게는 2만년 유지, 작물다양성 곳집
기후변화, 야생작물 탐색보다 빠르면 식량 재앙

 
img_01.jpg1941년 7월 히틀러의 군대가 폴란드를 넘어 소련으로 침공했다. 스탈린은 독일에 빼앗겨서는 안 되는 문화유산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급히 옮겼다. 거기에는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미술품과 함께 현대 작물육종의 창시자인 니콜라이 바빌로프(1887~1943)가 전 세계의 풍요로운 농촌을 돌며 수집한 씨앗과 뿌리와 열매의 표본이 들어있었다.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종자 포대는 손 안대
 
나치는 레닌그라드를 872일 동안 봉쇄했고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끔찍하게 추웠던 1941~1942년 겨울, 모든 식품 공급이 끊겼고 포탄이 날아다니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고양이, 개, 쥐, 쓰레기 심지어 다른 사람까지도 먹었다.

 
하지만 상트이사크 광장의 지하실에서는 아무도 씨앗과 뿌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종자가 전쟁이 끝난 뒤 소련 인민을 먹여 살릴 마지막 자산이라고 굳게 믿은 바빌로프의 동료 과학자와 직원 8명은 감자 포대와 쌀자루를 지켜보면서 굶어 죽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종자를 먹어치우지 않는 지혜가 농부와 육종학자만의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가 지구 전체에 재앙을 불러왔을 때 40년 안에 90억에 도달할 세계의 인구를 어떻게 먹일 것인가. 바빌로프는 종자를 얻기 위해 한 세기 전 노새를 끌고 파미르 고원에서 에티오피아와 아메리카를 거쳐 아마존 열대우림까지 다섯 대륙을 탐사했다. 하지만 현대의 ‘바빌로프’는 북극 영구동토에 세계의 모든 종자를 안전하게 지킬 저장고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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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벼 보리 콩 조 등 1만3000여 점 맡겨
 
세계작물다양성트러스트(GCDT)는 노르웨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8년 2월26일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스피츠베르겐 섬에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를 건설했다. 저장고는 영구동토 밑 암반을 130m 뚫어 길이 120m, 면적 270㎡의 3개로 분리된 방으로 이뤄져 있다.

 
바깥 날씨도 늘 영하이지만 저장고는 그보다 찬 영하 18도로 유지된다.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상승해도 끄떡없는 위치에 자리 잡았고, 4중 잠금 문에다 기밀식 출입구와 공기 차단문이 2중으로 설치돼 웬만한 외부 충격에도 안전하도록 설계돼 있다. 차고 건조한 저장고 안에 종자를 보관하면 보리는 2000년, 밀은 1700년, 사탕수수는 2만 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한 상태로 간직할 수 있다.

 
900만 달러나 들여 이런 저장고를 만든 이유는 인류 생존을 위한 최후의 안전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세계에는 종자은행 또는 유전자은행이 약 1400개나 있다. 이 종자은행은 가장 귀중한 자신의 종자를 스발바르 보관소에 맡긴다. 최악의 사태로 그 나라의 종자은행이 못쓰게 될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농촌진흥청이 노르웨이 정부와 세계식량농업기구(FAO)와 종자기탁협정서를 체결해 종자 가치가 뛰어난 보리, 콩, 벼, 조, 수수 등 국내 작물 1만3000여 점을 이곳에 맡겼다. 이 저장고엔 이미 수백만 점의 종자가 보관돼 있으며 저장능력은 모두 20억 점이다.
 

쌀 개화기 온도 1도만 떨어져도 수확량 10% 줄어
 
세계작물다양성트러스트는 지난 12월 영국 큐왕립식물원과 함께 세계 주요 농작물의 야생종을 확보하는 야심적인 사업에 착수했다. 앞으로 10년 동안 세계적으로 중요한 23종의 식량작물, 곧 알팔파, 서아프리카 밤바라 땅콩, 바나나, 보리, 콩, 귀리, 감자, 벼, 사탕수수, 해바라기, 고구마, 밀 등의 야생 근연종을 찾는 것이다. 확보한 종자는 스발바르 저장고를 비롯한 여러 종자은행에 보관되고, 유전자 물질과 정보는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사업을 출범하기 위한 비용 5000만 달러는 노르웨이 정부가 댔다. 왜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야생작물을 찾는데 많은 돈을 쓰는 걸까. 케리 파울러 세계작물다양성트러스트 사무총장은 “기후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달라진 기후환경에 적응해 자라는 작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과거 달랐던 기후에서 살았던 야생종에서 가장 적합한 후보를 찾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머뭇거리다간 그 야생종들은 영영 사라질지 모른다.

 
예를 들면, 쌀은 개화기 온도에 매우 예민하다. 개화기에 온도가 1도만 떨어져도 수확량이 10% 줄어든다. 기후변화에 따라 이보다 심한 온도변화가 일어난다면 수확량에는 엄청난 타격이 올 것이다. 만일 야생 벼 가운데 온도가 낮은 밤에 꽃이 피는 종이 있다면 이 문제에 대처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야생 작물 탐색 작업은 기후변화와의 경주이다. 야생종이 주로 사는 개도국의 농촌은 급속한 개발로 자생지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또 야생종에서 유용한 형질을 뽑아내 농작물로 육종하려면 적어도 7~10년이 걸린다. 그런데 현재의 기후변화 속도로 볼 때, 지금 당장 준비해 달라진 기후에 적응하는 농작물을 길러내지 않는다면 인류는 식량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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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품종 80년만에 95% 사라져
 
신석기 시대 우리 조상은 수렵과 채취를 하러 다니다가 먹음직한 이삭을 매단 풀을 보았을 것이다. 식물은 대개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종자를 흩뿌린다. 익은 종자가 그대로 매달린 식물은 드물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어떤 풀은 탐스런 이삭이 잘 익은 채 달려있었고, 이 최초의 농민은 그 풀을 캐어다 움막 근처에 심었다. 이듬해 이 최초의 밭에서 신석기인은 맛좋은 곡식을 처음으로 수확했을 것이다.

 
지난 1만3000년 동안의 농업의 역사는 이처럼 야생작물에서 재배종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야생 작물이 주로 자라는 개발도상국에서 야생근연종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어디에서든 풍부했다. 하지만 다수확품종을 중심으로 한 단작농업이 확산되면서 농작물의 다양성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선진국에서도 이런 추세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기록을 보면, 1903년 양배추 품종은 무려 544종이었지만 1983년 28종밖에 남지 않았다. 95%가 사라진 것이다. 같은 기간 동안 토마토는 408종에서 79종으로 땅콩은 31종에서 2종으로 줄었다.

 
오늘날 널리 재배되는 작물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어떤 왕조의 것보다 복잡하다고 한다. 밀의 경우, 작은 활자로 인쇄해도 그 계통도를 다 그리려면 길이가 6m인 종이가 필요하다. 여러 나라에서 온 수백 가지 품종을 교배해 만든 품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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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차이가 새로운 육종 위한 무한 자원
 
농작물의 품종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 밀만 해도 파스타를 만드는 밀과 빵을 만드는 밀이 다르다. 날로 먹는 토마토와 케첩을 만드는 토마토도 전혀 다른 품종이다. 열이나 가뭄에 견디는 능력, 토양과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 병충해 내성, 영양분과 맛의 차이 등에 따라 농작물 품종은 다르다.

 
이런 유전자의 차이가 새로운 육종을 위한 무한정한 자원이 된다. 야생종을 포함한 농작물의 다양성은 쌀과 밀이 20만 가지, 사탕수수 4만7000가지, 콩과 옥수수 3만 가지, 땅콩 1만5000 가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쌀만 해도 무려 110개 나라에서 재배한다. 그만큼 다양한 환경에서 자란다는 얘기이고, 그동안 엄청난 육종과 개량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역경이 닥치면 이런 다양성이 말을 한다.

 
한국, 일본, 중국에서 많이 재배하는 자포니카 계열의 벼에는 벼줄무늬잎마름병이란 치명적 바이러스가 엄청난 피해를 일으켰다. 일제 때는 벼가 노랗게 말라죽어가는 이 병 때문에 지역에 따라서는 수확량의 70%가 사라지기도 했다.

 
이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국제미작연구소(IRRI)는 보유하고 있던 1만 종의 야생 벼에서 항 바이러스 형질을 지닌 품종을 탐색했다. 결국 인도에서 자라는 야생 벼인 오리자 니바라에서 그런 형질을 발견했고, 이 야생 벼의 유전자는 그 후 모든 개량 벼의 형질 속에 포함됐다. 줄무늬잎마름병을 이기고 1970년대 쌀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높인 새 품종이 바로 통일벼이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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