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가치는 이론적인 설명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교감하는 것이죠. 시리우스에서는 동물과 대화가 가능하고 잘 훈련받을 경우 식물과도 가능하지요. 직접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느껴보는 것, 그것이 시리우스의 자연교육입니다. 느낄 수 있고 대화까지 가능하다면 공존의 중요함을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인간의 경우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쇠퇴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 능력만 회복할 수 있다면 인간의 가슴 속에도 자연에 대한 사랑과 공존의식이 자연스럽게 살아날 것입니다.
- 멋있네요. 동물과 대화하고, 식물과 교감하고. 생각해보면 우리 선조들도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법을 생활 속에서 터득하고 있었지요. 겨울철 까치를 위해 남겨놓았던 ‘까치밥’이 그랬고 고사를 지낼 때 주변 생명체들에게 나눠주는 ‘고수레’가 그랬고요.
동이족, 특히 한국인의 선조들은 비록 자연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능력은 퇴화했지만 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까지 퇴화하지는 않았지요. 인간만이 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또 풍성하면 풍성한 대로 자연과 나누는 풍류와 멋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지만요.
- 앗, 어떻게 우리 선조들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세요?
동이족의 문화는 우주에도 널리 알려져 있고 중요한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도 나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답니다.^^
- 저도 예전부터 자연과의 교감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감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가슴 속에 전달되는 바가 있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변화가 생기는 게 아닐까 싶고요.
맞습니다. 머리에 전달된 정보가 가슴을 울리고 행동을 끌어내어야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마음에 호소하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적절한 방법을 통해 되살릴 수도 있습니다.
- 적절한 방법이라고 하셨는데 자연과의 교감을 위해 자연체험 말고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생명을 가꾸는 것입니다. 흙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나무를 가꾸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도시를 떠나 혹은 도시 속에서라도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다면 의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흙은 생명체를 만들고 키우기 위해 조물주님이 만드신 재료이자 도구입니다. 물질세계의 흙에는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기 위한 모든 기운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무수히 많은 미생물과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지요. 생명의 보물창고, 식량창고라고 할까요?
때문에 거기에서 나고 자란 인간은 흙을 만지고 대하게 되면 원래 지구에 뿌리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근원적인 생명의식과 만나게 됩니다. 흙은 생명이고 뿌리이며 고향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그런 땅에서 멀어지면서 생기게 된 것이고요. 비록 퇴화되었다고는 하나 흙을 만지는 순간 인간은 DNA 속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적인 생명의식과 공명하게 됩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에게 흙만큼 좋은 의식 각성의 도구도 없을 것입니다.
[출처] 개인차원의 대비-흙으로 돌아가는 생태공동체-1|작성자 희망 메신저 서포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