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난 봄빛을 봤다.

조회수 11396 추천수 0 2013.03.01 01:36:51

(난 봄빛을 봤다)

 

 

겨울산2.JPG

오늘 아침 겨울 햇살 속에서 난 봄빛을 봤다. 양력도 2월 초하루이니 아직 겨울 한복판임은 분명한데도 말이다. 즉 절기상 입춘도 아직 사흘은 남았단 말이다. 남들은 과장이 좀 심하지 않느냐고 타박을 던져줄지 모르지만 난 분명히 봄빛을 봤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렇겠지, 긴 겨울 동안 혼자 극도로 외로운 입장이었을 테니 맘이 먼저 앞서기 때문일 것이란 넓은 이해도 필요 없다. 곧 죽어도 난 봄빛을 봤단 말이다. 남들보다 내 원안 또는 심안이 더 넓고 멀리 열려있기 때문이란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때문에 강력한 주장이더라도 홀로 속내로만 한다.

 

시린 듯 파란 하늘 배경에 각도가 좋은 구릉엔 흰 눈 자취가 거의 사라졌지만, 벌써 열흘 가량 지속되는 겨울 추위에 낮은 곳 눈은 절반이 얼음으로 공고하다. 햇살의 극성 때문에 표면의 눈은 녹으려 애를 쓸지라도 차가운 기온이 협조를 해주지 않을 경우 눈은 녹다가 어는 변덕에 몸살을 앓게 되고, 덕분에 서릿발처럼 뾰족하고 창날처럼 사납게 강퍅한 모습을 표정으로 확실하게 남긴다. 이 시기부턴 겨울 동장군의 고집스런 자취와 봄의 은근한 부추김이 함께 공존하는 어중간한 시기인 것이다.

 

어제 달포 만에 아래 양지마을 오 선배에게서 안부 전화가 왔다. 말하기 쉬워 아랫마을이래도 예서 30리, 거기 비 올 때 여기 눈 온다. 새해 들어 아직껏 얼굴 마주할 기회가 없었으니 연하 인사를 겸해 간만에 회포란 한번은 풀어야 하지 않겠느냔 뜻이다. 뜻은 그래도 말씀은 ‘죽었니? 살았니?’ 라 신다.

내 성격상 싹싹하게 먼저 찾아다니는 붙임성은 없으니 십중팔구는 외부에서의 초청이 일반적이다.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자주 찾아가 어울려 봐야 어렵게 목까지 채워놓은 찰랑찰랑한 푸른빛 감성이 덜어지면 덜어졌지 남는 건 일절 없더라니……. 하지만 사람 사는 이유가 계산기 답처럼 똑떨어지게 분명한 건 아니지 않은가, 인정이 어디 늘 파랗기만 하던가, 두말할 나위 없이 초청은 고마운 일이지만, 얼음으로 변한 눈밭이 우선 머리를 가로막았다. 한껏 눌리고 다져진 높이가 10여 센티미터에 불과해 별건 아니라 쳐도, 길이 100여 미터의 눈길도 별것 아니라 해도, 긴 기간 슬로시티의 고요함에 깊이 길들어있는 지금의 컨디션에선 녹녹치 않은 시련이 된다.

 

아침 산책 시엔 눈 위를 걸어도 발자국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표면이 굳다. 자주 밟고 다니던 눈길은 내 걸음에 하도 다져져서 거울같이 윤기마저 난다. 행여 미끄러지랴 새 눈을 골라 살금살금 걷다가 뒤를 돌아다보면 청개구리처럼 싸돌아다니는 내 흔적이 언 눈 위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오솔길을 몇 삽 뜨는 시늉만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일의 진도도 지지부진하고 바닥까지 완전히 밀어내지 않는 한 빈 트럭이 안전할 순 없었다. 길바닥이 아예 말끔하지 않을 경우 비스듬한 내리닫이야 타력을 받아 어찌어찌 나간다쳐도, 다시 들어오진 못한단 걸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다시 들어오지 못할 경우 불쌍한 내 차 고물이는 안심하고 잠잘 곳이 없다.

여러 날 다져지고 언 눈이 삽으로 말끔하게 떠지지 않는 건 당연하다. 흙보다 돌이 많은 울퉁불퉁 돌길, 만들 때 유난히도 힘들었던 오솔길, 소문 자자한 강원도 산길이라 긁어도 쉽게 긁히지 않는다.

아무리 인정이 그립고 초대가 고마워도 돌아서야 한다. 서운함이 넘쳐 뭣 때문에 누구 도저히 나가지 못하겠노란 인사치레도 차라리 떼어먹고 만다. 속상하게시리 괜스런 전화나 하지 말 것이지…….

봤다. 깨금발로 다가오는 새아씨 걸음발 같은 봄빛을 분명히 보긴 봤어도 이 계절 깊은 산골짜기 누구는 아직 동장군 벗님네와 그럭저럭 함께 어울리며 살아내고 있단다.

 

** 자연수상록 ‘한 스푼’(어문학사)에서 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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