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속에 숨은 세상)

 

침목다리 아래 거꾸로 붙어있던 농구공만 한 말벌 집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거의 완벽한 원형을 이뤄 내용이야 어쨌든 지극히 잘 생긴 말벌 집이 누구에 의해 기어코 손을 탄 모양이었다.

다리 아래 그곳에 거창한 말벌 집이 있었단 사실을 제일 가까운 내가 오히려 가장 뒤늦게 알았으니, 도로보수 담당직원인 이웃 동네 아우가 봄부터 여름 내내 이따금씩 해괴한 짓을 해도 난 그 의미를 전혀 몰랐었다. 혼자 들기에 벅찰 정도로 커다란 바위를 낑낑거리며 들고 와 다리가 무너지라고 복판에 쾅쾅 던져대던 고약한 이유를 말이다. 기껏 던져 놓고는 꽁지가 빠지라고 멀찌감치 달아나던 건장한 사내의 모습은 이유를 모를 경우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1년에도 몇 차례씩 들려오는 소식처럼 말벌의 떼거리 내습이란 자칫 사람 목숨마저 앗아갈 만큼 위험한 것이란 건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니까.

한땐 아닌 게 아니라 크게 오해도 했었다. 내게 무슨 억 하는 심정이 있어 저처럼 출입구 다리에다 저주 아닌 저주를 고약하게 부리는가 싶기도 했었으니까, 아우는 소행이 착실할뿐더러 나와도 제법 사이가 좋은 편이었으니 하는 말이다.

결국 먼저 온 알밤 철에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 알밤을 줍기 위해 물 가까이 내려가 우연히 다리를 밑에서 올려다봤을 때에야 비로소 지난 1년 동안 아우의 해괴한 행위를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겉 표면이 멋들어진 소용돌이 형 가마 무늬에다 잘생긴 구형의 모습을 갖춘 다갈색 말벌 집은 가히 예술 작품이었다. 이걸 어쩌자고 다리 위에서 그토록 못살게 굴었을 진 나중에 만나서 물어봐야 하겠지만, 보기 드물게 거창하고 탐이 날 정도로 완벽한 건 사실이었다. 이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리 위를 산책도하고 한참씩 머물러 흐르는 냇물도 구경하는 등 임의로 통행을 했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었던 천진스런 시간이 다행일 뿐이었다. (옳지! 겨울이 되어 말벌들이 다 나가고 집이 비었을 안전할 때 회수해 둬야겠구나!) 하고 벼르고 미뤄뒀던 게 그만 아우보다 한 걸음 늦고 말았던 것이다.

크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작은 쌍살벌 집은 그동안 몇 개 회수해 둔 게 있으나, ‘노봉방’이란 이름으로 간경화, 간질 특히 고혈압에 잘 듣는다는 민간처방의 약재용도와 단지 실내 장식용으로도 쓸모가 그만인 거창한 천연의 말벌 집은 그만큼 가치가 있음이란 사실도 뒤에 아우에게 들어서 알았다. 그토록 벌들을 못살게 군 이유 또한 그러면 그럴수록 긴장한 말벌들이 제집을 자꾸 크게 키운단 뜻이 들어있었다. 게다가 철이 지나 말벌들이 다 집을 나가버리면 그 가치가 크게 떨어진단 사실까지도 말해줘서 알았다.

집을 통째로 잃어버린 말벌 몇 마리가 다리 밑바닥에 약간 남은 자취에 안타깝게 붙어있을 뿐, 가공의 볼만한 경치는 그렇게 남의 손에 이끌려 사라지고 말았다. 내 것이란 주장도 설득력이 강하지 않을 것이니 그저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게 좋을 것이다.

무허가 주택이라고 말벌들을 나무란 적도 없고 벌집이 미처 비워지지 않은 이 시기에 그를 철거하기도 보통 솜씨와 배짱으론 안 되는 일, 이는 발견한 처음부터 아우의 몫이었을 것이다. 이웃한 토종 꿀벌들은 이로서 한숨을 놨을 테니 다시 찾은 안정을 꿀벌 녀석들과 함께 그저 고마워할 따름이다.

 

마냥 허망한 줄 알면서도 습관처럼 동산을 헤맨다.

한참 전 알밤 철이 완전히 끝난 빈 동산엔 가을색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 간다.

봄부터 눈처럼 흰빛으로 뜨락을 가득 채워주던 개망초 허물어진 자리에 구절초 은근한 색깔이 고스란히 자리물림을 하고 있다. 누가 같은 국화과가 아니랄까봐 크기나 색상만 아니라면 그놈이 그놈일 정도로 모습이 꼭 닮아있다. 햇빛이 덜 들어오는 그늘진 쪽에 핀 구절초는 자주색이 더 짙고 볕이 좋은 곳 구절초는 흰색이 더욱 짙다.

늘 그랬듯이 푹 숙인 고개와 눈길에 알밤 대신 오늘부턴 꽃향유 꽃봉오리가 눈에 확 들어온다. 불과 하루 이틀 상간이다. 아직 보랏빛이 제대로 자리 잡기 전이라 강아지풀을 닮은 마냥 연약해 보이는 봉오리가 바람결에 잔잔하게 흔들린다.

꽃향유 역시 가을꽃이라서 햇빛이 좋은 남쪽 능선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봄꽃들과는 반대로 북사면에서부터 앉은자리를 순차로 넓혀오기 시작한다. 순차라 해도 불과 이삼일 상간, 얼핏 퍼지는 시기를 놓쳐버리면 만산이 금세 꽃 잔치에 한껏 빠져 버린다.

아무리 좁고 야트막한 동산이지만 계절 꽃의 구획은 이처럼 결코 어긋남이 없다. 다음에 올 계절의 방향을 미리 알려주려는 듯 봄꽃과 가을꽃은 피어오는 방향이 분명히 반대인 것이다.

 

이슬에 젖은 계절의 아침 잔치에 행여 빠질 새라 오솔길엔 감잎 붉은 색이 순차로 덮여가고 있다. 이것도 이삼일 상간이면 길을 완전히 메울 것이다. 벌써 산책길에 발걸음 소리가 제법 바스락거린다. 이 바스락거림이 끝날 즈음 아침 이슬은 차디찬 서리가 되어 잔인한 계절을 기어코 밀어 보내리라. 마른 감잎 바스락거림에 다가올 계절에 눈 밟는 소리가 얼핏 연상되는 건 맘이 그만큼 바쁘단 뜻일까?

워낙 가지치기를 함부로 한 덕분에 꼭대기에 달린 몇 안 되는 감이 홍시를 이루고 있다. 물봉지처럼 축 늘어진 홍시가 보기에 아슬아슬하긴 해도 난 차마 손을 대지 못한다. 아무리 세고 또 세어 봐도 먼저 까치밥을 빼고 나니 내 먹을 건 찾아지지 않더라, 돌아서면 그뿐 어차피 맛도 없을 테니까.

 

단풍나무, 붉나무, 떨기나무에 감나무까지 낙엽 되어 떨어지기 전에 먼저 단풍이 되어 계절의 진수를 맘껏 뽐내고 있고, 그 남은 언저리를 구절초와 꽃향유가 나지막이 장식하고 있다. 단풍만 하더라도 지천으로 황홀할 지경인데 이 계절에 희귀한 꽃 잔치까지 더해지니 형언할 수 없이 황홀한 선경이 곱으로 베풀어진다.

공교롭게도 이 계절에 피는 꽃은 흰색, 보라색 등 단풍엔 없는 색깔이 대부분이다. 꽃은 꽃대로, 단풍은 단풍대로 색을 서로 중첩시키지 않으려는 이를 두고 금상첨화(錦上添花)란 것일까? 이 계절의 꽃과 단풍이 색깔 중첩을 극력 피하려는 이유가 남은 곤충들이 즐기는 한해의 마지막 성찬을 헷갈리지 않게 하려는 자연의 아량이고 깊은 분별력이 아닌가 싶다.

 

10월도 하순 이른 아침엔 꿀벌을 위시로 나비, 나방, 꽃등에 등 한해의 마지막 성찬을 거두려는 지친 이웃들로 인해 사위가 제법 부산해진다.

해가 일찍 비쳐 기온이 먼저 올라간 양지쪽 꽃엔 이웃한 곤충들이 날개를 서로 부딪칠 정도로 바글거려도 아직 그늘 속 차가운 꽃잎엔 그림자조차 없다. 그늘진 꽃 꿀샘의 꿀은 아직 부족한 열기에 채 녹지 않아 벌 나비 등이 길고 가는 주둥이 빨대로 쉬이 빨아들일 만큼 유동성이 좋지 않단 뜻일 게다.

얼마 남지 않은 성숙한 계절의 끝을 장식하는 귀한 성찬인 줄을 아시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참견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없이 제 중요한 일보기에 그저 여념이 없을 뿐, 자칫 모른 척 몸이 부딪치면 서로가 황급히 비켜 갈 정도다.

바로 옆자리 마른 풀잎엔 날개에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된장 잠자리와 고추잠자리는 이들의 부산함이 딱하단 듯 물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다.

크기는 물론 몸 색깔마저 진갈색으로 누렇게 완전히 성숙한 나머지 동작까지 점잖아진 왕사마귀는 곁에 곤충들이 바짝 다가와 있어도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처럼 사납게 핏대를 곤두세우지 않는다. 만사가 태평스러운 이 같은 시간에 제 몸 체온을 먼저 높이고 볼일인 모양이다.

이처럼 늦가을 이른 아침 산골짝에 동거하는 생명체들은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태평천지의 무작정 숭고한 순정의 시간이 숨겨져 있다. 유난히 푸르고 맑고 풀 익는 냄새도 좋은 시간, 하느님조차 발소리를 줄이시며 시비곡절 간섭을 피해주시는 축복의 아침, 온 뜨락 전 우주가 모두 평안하고 안전한 절대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평안한 절대시간이 그리 오래갈 린 없다. 태평천국의 평안한 아침이 깨지는 신호는 대기의 기온이 빠르게 올라감에 따라 풀 씨방 마른 콩꼬투리가 비틀리다 터지는 신호, 바로 풀 단풍 소리를 기화로 삼는다.

‘톡 띠딕!’ 사방으로 비산 되는 작은 씨앗 알갱이들의 소나기에 왕사마귀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지구는 잠시 미뤄뒀던 세상사 순환계 질서를 비로소 되찾는다. 그때부터 꿀벌은 나비에게 성화를 부리고, 나빈 꽃등에한테 극성을 대고, 왕사마귀는 풀무치를 뒤쫓고, 풀무치는 달아나고……. 하느님도 어쩔 수 없이 심판석에 다가앉으시면 나도 비로소 뒤늦은 세수도 하고 아침밥도 먹으러 내 세상으로 돌아온다.

 

** 자연수상록 ‘한 스푼’(어문학사)에서 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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