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억새꽃 피는 언덕

조회수 12125 추천수 0 2012.12.08 05:20:42

(억새꽃 피는 언덕)

 

외로움과 공포심, 이 두 가지는 현실 의식에서 일찌감치 졸업하지 않으면 한 달도 버틸 수 없는 산골짝 현상에서의 누구네 입장이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추상이란 지극히 관념적인 가상의 공간에서 가공되고 조작되고 또한 증폭도 되는 말짱 헛것이더란 증빙을 난 온몸으로 체감 실증하며 두해를 넘겨 묵연히 살아내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각오와 준비가 되어있다 손치더라도 애초부터 모르면 모르겠거니와 왔다가 사라지는 벗들로 인해 이따금씩 몰려드는 고독감까지 다 막아낼 순 없다. 이는 이해로서 의식상의 표면요소가 아니라 다분히 느낌이란 감성 안쪽의 소관이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고독감 또한 내겐 창작과 발상에서 더 없이 긴밀한 요소가 됨이니, 도정을 함께하는 도반으로 필연의 벗 삼을지언정 마다할 요소가 결코 아님이다.

 

억새도 마찬가지, 제1의 도반이자 긴밀한 벗인 반딧불이가 사라진 마당에 그나마 짧은 계절을 위로해 주는 누구에겐 은근한 벗이 아닐 수 없다. 짧은 기간 곁에 머물다 사라진 다음에 몰려드는 허전한 뒷맛을 누구는 매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의존함의 숙명으로 다만 다소곳이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아직 여름 끝자락이 남아있는 9월도 초순, 다소 이른 억새부터 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먼저 개화되는 억새는 눈처럼 찬란한 은 억새다. 은 억새가 금 억새로 치장을 슬며시 바꾸고 금 억새가 갈 억새로 바뀔 때쯤이면 계절은 드디어 가을도 마무리로 접어든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대형 난초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장대한 잎과 줄기엔 의외로 관심을 두는 이가 드물다. 흔하기 때문이다. 이름처럼 억세기 때문이다.

얼마나 흔하고 억세면 악착같기로 소문난 잎벌레조차 선뜻 달려들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눈길이 억새 줄기와 피어난 잎새로 다가가면 사람들은 그때서야 깜짝 놀란다. 올곧고 기운찬 자태에서 귀한 난초의 청초함에 더해진 강인한 호연지기가 함께 발견되기 때문이다.

억새와 난초의 강건함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강건함은 호연지기에서 나온다. 만일 청초하면서도 강건하다면 그건 참으로 희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흔하되 희귀한 가치, 가을철 억새가 바로 그러하다. 이처럼 많고 많은 식물들 중에서 억새풀의 감성은 사람의 감성과 통하는 바가 아주 많다. 많고도 진하다.

대궁 끄트머리에서 하얀 꽃이 밀고 나오기 시작하고 가을 태양이 개화를 부추기기 시작하면 난 그제야 비로소 ‘아하! 너 거기 있었구나?’ 하며 퍼뜩 관심을 차리게 된다. 관심은 곧 감탄으로 이어지고 감탄은 이내 유혹으로 성장한다. 유혹 다음은 빈틈없는 몰입이고 이는 11월 상순경에 절정을 본다. 나머지 여진일랑 12월까지 진하게 이어진다. 꽃 피는 제철 이외엔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음전한 친구, 잡풀이면 한갓 잡풀일 뿐인 존재가 종국엔 대기와 누구의 영혼을 이처럼 하루에 한 치씩 확실하게 점령해 가는 것이다.

 

억새가 가장 볼만할 시기는 금 억새에서 갈 억새로 바뀌기 직전, 늦가을도 지나 초겨울의 채비를 거의 갖춰 갈 즈음이다. 개화 초기 순백색으로 한껏 전개될 땐 눈에 와 닿는 감이 다소 강경해 부담스러운 일면이 없지 않으나, 다소곳한 금 억새로 안정을 이루게 되면서 무리 전체엔 윤기 있는 기품과 함께 지상의 것으로부터 천상의 것으로 소관이 이전되는 그때부턴 지상의 한갓 억새가 아닌 것이다.

만개할 대로 만개한 억새, 황금색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농익은 금 억새에 렘브란트 사광, 반 역광으로 어슷하게 햇살이 비켜 들어올 때 억새밭은 숨겨있던 빛과 꿈의 날개를 순순히 펼쳐준다. 조용히 잠자듯 꿈꾸고 있던 순정한 세상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청량한 광채를 발하며 잔바람에도 쉬이 몸을 뒤채는 억새꽃의 금빛 바다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세로로 누울 땐 은발 옷자락이 가로누울 땐 금색 옷자락으로 얼굴 표정을 달리해 가며 이곳 세상과 저곳 세상의 시간을 바람의 끈으로 엮어두려 한다. 빠르게 흐르는 가을이란 시간이 아무래도 안타까운 모양이지만 서두름도 없다.

거대한 날개가 은가루와 금가루를 공중 높이 뿌려대고 바람은 그를 다시 땅으로 넓게 펼치며 살아있는 융단의 파도를 이룬다. 비단옷자락이 서로 비벼지고 스쳐지는 소리가 온 대기에 아찔하도록 채워진다.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몸짓이 아니니 함부로 이르지 말란 당부와 함께 그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사그락-사르락’ 리듬을 탄다. 저들에겐 의당한 몸짓 하나 하나가 누구에겐 기적의 연속이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정밀한 시간으로 곧장 이어진다.

언어가 닫힌 무한 침묵 속이라야 천상에서 심상으로 흐르는 대화는 영혼의 울림이 되고 억새네 몸짓 춤사위를 따르기 마련, 자아는 간 곳 없고 초자아로서 무아의 정묘한 세상 경지를 억새와 더불어 더듬어 가는 것, 어딜 돌아봐도 나그네는 없고 구도자 그만 서있다.

 

높은 억새가 가로로 누울 때 낮은 쪽 억새는 옆으로 길을 비켜준다. 휘돌다 만나기도 하고 나란히 달리기도 하며 천사의 옷자락이었다가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되어 심상의 시정을 마구 흔든다. 희나리 티끌 하나 없이 맑은 가을 공기 속엔 계절의 대화, 시간의 서정시가 절절히 흘러넘친다. 땅에서 울리는 피콜로 소리가 하늘에선 코넷 테누토의 긴 여운이 된다.

뭣을 향한 손짓이던가, 솔베이지 흰 손수건은 가슴에 오롯한 감동의 물결로 구비치고, 이노크 아덴의 그리움인 듯 메아리를 안고 감돌아든다. 가슴이 비어 허전하게 서있는 누구를 두곤 차마 멀리가지 못하는 것이다.

황금빛 억새의 손, 서둘지 않는 완만한 손길은 자신의 세상 한구석에 서있음을 무심이라면 허락하고, 부지 간에 고여지는 회한의 뜨거움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 귀한 그리움이 행여 황토 바닥에라도 떨어질라 너울거리던 솔베이지 손수건은 남들 모르게 누구의 눈가로 다가온다. 바람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노크 아덴은 입술만 살짝 깨문다. 핏빛 가을 내음이 입술 사이에서 터지고 오래 맴돈다.

 

참 자연의 은밀한 비밀은 아쉽게도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햇살이 제 각도를 조금만 무너뜨리면 억새는 그냥 평범한 억새로 곧 돌아오고야 만다. 언제 살아서 숨 쉬는 천사가 제 옷자락을 펼쳐 보인 적이 있었냐는 듯 고요함의 새침때기로 냉큼 돌아서고 마는 것이다. 정지된 몸짓에선 더 이상 노랫소리가 흐르지 않는다.

아무리 귀 기울이고 기다려도 금 억새 숨 고르는 새근거림조차 들리지 않을 때, 깊어지는 산그늘이 억새를 숨기고 들 때, 누군 비로소 제 세상으로 돌아오고 두 다리에 간신히 힘도 들어간다. 급속히 내려가는 대기의 찬 기온에 멈췄던 긴 한숨이 무겁게 토해지면 이제 그만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움이 깊어서라도 좋고 감동을 잊지 못해서라도 좋다. 기억된 시간에 간곡한 맘을 앞세워 다시 그곳에 발길을 넣어 보지만 똑같은 감흥으로 다시 만나지는 경우란 없다. 우주의 내밀한 비밀이고 감춰진 선녀의 옷자락이고 구도자의 순정한 뒷모습일진데 그게 그리 흔하게 내보여질 린 없다.

금 억새 밭, 비록 찰나에 지나쳐 버린 짧은 정경이라도 누구네 영원의 연못 속에 깊이 각인된다. 그저 가슴에만 담아둘 뿐 아무에게 말도 하지 못한다.

전달할 방법도 언어도 모를 뿐 밖으로 내지 못하는 속 깊은 사연이기에 가을에서 겨울사이 환절기 그맘때쯤 누군 한 번씩 억새꽃 가슴앓이를 속절없이 홀로 그냥 앓아내야 한단다. 스무 번, 서른 번을 거듭해도 도무지 인이 배기지 않는 이노크 아덴의 혹심한 계절병이란다.

 

소묘3.jpg

 

** 자연수상록 ‘한 스푼’(어문학사)에서 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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