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골짜기엔 춘정

조회수 9565 추천수 0 2013.05.15 22:22:12

(산골짜기엔 춘정)

  개구리2.JPG

모처럼 아침이 가까울 때까지 기절하듯 깊은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1일 평균 3시간의 수면만으로도 살기에 모자람 없는 내겐 드문 경우다.

어슷한 탁상등 아래에서 두견새 울음소릴 안주 삼아 지난 밤 술도 두어 잔 하긴 했다. 술 한 모금 입에 물고 눈감은 채 두견이 소릴 귀로 가슴으로 들을라치면 안주야 일절 필요치도 않거니와, 언제 넘어갔는지 모르리만큼 스르르 사라져 버리는 입안에 든 밤을 마시는 손님이었다.

 

도대체 물이 적은 산하에 초록의 바탕은 역시나 늦다. 많이 늦다.

어렵사리 생존을 이어가는 올챙이들과 나머지 개구리 알들이 애처롭다.

오늘아침에도 서리로 하얀 길을 밟고 무논에 살얼음을 누르며 두어 동이 샘물을 대주긴 했어도 자꾸 바글바글해지는 좁은 바탕을 넓히기엔 나도 더는 방법이 없어라,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고.

그러던 중 불쑥 찾아온 친근한 맹꽁이 꼭 한 마리로 짐짓 위안을 삼았다. 이 바탕에서 맹꽁인 처음 만나는 동글동글한 손님이었다. 가끔씩 끔뻑이는 눈, 좀 더 자주 볼록거리는 모가지, 아무리 얼굴을 들여다봐도 늘 웃는 얼굴일 뿐, 어긋난 구석이라곤 한구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웃사촌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 손등에 올라와서도 온기의 혜택이 의외로 운지 도통 내려갈 생각을 않더라. 서리가 하얗게 낀 냉한 땅바닥보다야 물론 천국이겠지만, 물갈퀴도 없는 세 가닥 손 발가락으로 만져지는 손등의 감촉이 그저 부드럽게 간지러울 뿐, 한참을 그렇게 손위에 올려놓고 놀았다.

 

고사리 철은 다가오는데 밀림은 아직 우거질 생각도 안하고 나머지 새싹들도 마냥 더디기만 하더라. 작년 소출이 시원찮은데다 비마저 귀해졌으니 산천이 차라리 온통 해갈이를 하시려나?

잘한다! 하늘이 또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게 비라도 제발 한바탕 쏟아 주시려나?

정강이까지 깊숙이 빠지는 묵은 낙엽 아래 보이지 않는 세상은 부디 건강하길 바라며, 돌아오는 산책길 새카만 굴뚝새 한 마리는 왜 자꾸 날 따라오시는가!

 

점심나절에 모처럼 쑥국을 끓여 봤다. 올 들어 처음이다.

드나들 때마다 밟지 않으려고 다리를 일부러 높이 들어 피해 다니던 현관 입구의 참쑥을 기왕에 신경 쓰이느니 얻어다 끓여 보기로 했을 따름이지, 특별하게 맘먹고 나선 어울리지도 않는 봄나물 잔치는 물론 아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따끈한 햇살을 받으며 현관 아래턱에 편안하게 걸터앉아 해바라기 삼아 불과 10여분이면 족했다. 아직은 여린 담뿍 쑥이지만 원체 한군데 많이 모여 있으니 엉덩이를 움직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꼭 한 그릇 분량만큼만 얻어왔다.

어디선가 얻어듣긴 했으니 뽀독뽀독할 정도로 힘을 가해 씻고 아무것도 필요 없이 단지 묵은 된장 반 스푼을 맹물에 풀어 좀 오래 끓였다.

햐! 봄철 항기란 향기는 거기 안에 다 들어있었다. 막상 끓여 놓으니 양은 좀 모자랐을지언정 약간 남아있던 숙취가 쑥국 한 스푼씩 입에 넣을 때마다 알아챌 정도로 서둘러 달아나는 것이었다. 심한 가뭄으로 속 타는 맘도 잠시 미뤄두고, 봄날을 만끽하는 짧은 지금, 이 오롯한 순간이 난 참 좋다.

 

오호라! 오후에 들어서면서 멀리 아랫마을 논갈이 경운기 엔진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드디어 이 서방이 농수로 다듬질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겨우내 낙엽이 덮이고 흙도 무너져 내린 농수로를 농사철에 맞춰 돌보는 건 지당한 연례 행사였으나 올핸 다소 늦었다. 잠시 후면 그토록 각박했던 마른논에 콸콸 봄물이 쏟아져 들어갈 테고, 개구리 녀석들 물대주기 과업도 이제 끝마쳐질 모양이다. 능청스럽던 표정의 맹꽁이는 미리 뭘 알았던 모양이지?

아무튼 물길은 역시 틔워 놓고 봐야하는 모양이다. 오솔길을 가로질러 무논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가는 맑고도 찬 개울물은 내 속마저 말끔하게 씻어 내려가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아침 산책 시마다 물 집어 올려 손도 얼굴도 씻는 냇물 하나가 또 거저 생긴 것이다. 게다가 맨땅을 통과하는 순 재래식 물길인 이곳 수로는 거치고 가는 곳마다 넓게 물대주는 역할을 겸사하기에 주변식생에 끼치는 선행의 영향력은 참으로 막중하다. 그 언저리를 배회하며 난 매년 봄 고사리 깨나 얻어 들이기도 했다.

 

저녁이 되기도 전에 마른 논자리가 급속하게 적셔지며 차츰 물그림자를 넓혀간다. 내 먼저 손길에 뒤이은 이 서방의 때맞춤, 이래서 올챙이들은 모두 빠짐없이 살았다. 내년엔 내가 관여해 주지 못할 것이니 부디 흐름 또는 팔자에 따를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본격적인 농사철이 되기 전에 어서 날 건 나오고 뗄 건 떼고 훨훨 넓은 마당으로 나가 살아라! 길이 잘살아라! 자동차 바퀴는 조심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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