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 한숨 한 스푼, 술 한 잔 눈물 한 스푼)
의외로 사람에겐 옛 추억을 골라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 불수의(不隨意) 능력이라선지 자신의 의지이면서도 자신의 맘대로 다룰 수가 없다. 그러기에 어떤 특별히 지정된 정보 또는 지식을 딱히 골라 뽑아 되새긴단 의미와는 분명 다르다.
잊지 않으려 애쓰는 추억과 잊어버리려 애쓰는 추억이 간단히 구분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잊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가슴에 각인되는 깊이는 거꾸로 더 깊어진다. 잊지 않으려 애쓰는 의지는 기억의 창고에 수납되기가 쉽고 무의지한 감성적 느낌이라야 추억의 골방에 남겨진다. 하매 추억이란 말이 붙으면 그건 이미 절반은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자신의 옛일일 따름이다.
추억은 바다와도 같은 것 날씨에 따라서 잔잔히 흐르는 것도 있고 격랑을 이루며 구비치는 것도 있다. 좋은 날씨의 추억은 햇살을 닮아 맑고 투명하지만 흐린 날씨의 추억은 역시 회색이며 무겁다. 가장 괴롭고 어려운 추억은 거친 격랑에 휩쓸리듯 사나운 추억이 아니다. 끝도 모르는 바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방향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오리무중인 것이다.
검은 차 한 잔 앞에 놓고 떠올리는 추억은 맑고 투명하지만, 맑은 술 한 잔 앞에 놓고 떠올리는 추억은 매번 진회색 투성이다.
오래된 어릴 적 추억은 돌아보매 슬며시 미소를 보이지만, 근래 만들어진 추억은 눈물 한 방울 ‘찍’ 묻어나는 게 많다. 아직 설익은 탓이리라.
날 살찌게 하는 추억도 있고 마르게 하는 추억도 있다.
이미 청춘을 한참 넘어선 난 추억의 깊이를 헤아릴 정도는 된다.
미욱한 재주로 인해 원고지에 힘들게 풀어놓는 글도 추억과 기억을 밑바탕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추억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일처럼 익는다. 익고 또 익다가 삭는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꽤 많은 인연들과 만나게 된다. 만남은 만남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아프게도 매번 이별을 통해 완성되기 마련이고, 이제가 마지막이길 늘 소원한다.
추억 중에 가장 질긴 게 있다면 바로 인연과의 이별이다. 깊이 사랑을 나누던 연인도 있고 오랜 우정을 나누던 친구도 있다. 호칭이 이별인 만큼 예후가 즐겁고 유쾌할 순 없다.
차일피일 맘으로만 안타깝던 오랜 옛 친구의 부음을 전해 들었을 때 벼락을 맞은 듯 사고는 의지를 꺾는다. 의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 속을 헤매고 있는 사이 친구는 기억의 창고에서 추억의 방으로 모든 인식이 하나씩 넘겨진다.
인연과의 이별이라 해서 기억이 모두 추억의 방으로 옮겨지는 것도 아니다. 부모 자식 등 필연적 인연 간에 이별은 고통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라선지 인연이 언제까지나 기억의 창고에 남아있는 채 추억 방으로 넘어가질 못한다. 기억의 장에 남아있는 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숙성되거나 익어가지 못한다. 늘 설익은 모습, 고통스런 기억으로 계속 남아있을 뿐이다. 기억의 창고는 머리에 있고 추억의 방은 가슴속에 있기 때문이며, 가슴이 이별을 인정하지 못해 들이길 거부하기 때문이며, 하도 공고하게 뭉친 응어리라 모가지 울대를 고비를 차마 타고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머릿속 기억은 색이 바라면 바랐지 숙성되는 경우란 없다. 망각이랄 순 있어도 기억이 승화된단 표현도 우린 하지 않는다. 숙성되고 승화되고 종내 곰삭는 건 오직 가슴속 추억일 뿐이다.
사랑이야말로 분명히 인연이다. 사랑이 제아무리 짙다하더라도 분명히 선택적 인연이고 언젠가 필연적인 헤어짐을 전제로 한 지극히 단편 일시적인 인연이란 말은 사실이다. 사람이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 기간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실적 달콤함에 젖어들고 내일로 미래로 줄곧 지향할 뿐이다. 발은 땅을 딛고 있을지라도 상상의 날개는 자꾸 위로만 향한다. 세상 모든 말들이 찬양 일변도이고 세상 모든 얼굴들은 하나같이 웃고만 있다. 만날 생각만 해도 즐겁고 만나면 즐거움이 배가된다.
사랑이란 감정은 처음엔 가슴에서부터 시작된다.
머리로 시발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사랑이 사랑으로 끝나면 계속 가슴에 남아 숙성되지만 사랑이 깨어지거나 배반을 당하게 되면 의지는 거꾸로 머리로 향한다. 질투심, 분노 등은 모두가 머리에서 이뤄지는 자의식이다. 그래서 사랑을 모르고 또 모를 일이라 하는가 보다.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은 인연 중에도 가장 고약한 인연된다. 천국과 지옥을 한 몸에 품고 있는 아주 고약한 인연 말이다. 그대 생각에 가슴이 설레지만 막상 존재 자체로는 고통이다. 빤히 눈에 보이는 관계의 한계성은 뛰어넘기 힘든 절벽이 되어 어깨를 짓누른다. 고약하단 표현이 틀리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의식이 머리 또는 가슴 어느 한곳에 안정되이 머물러 자리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갈팡질팡하는데 몸이 자유로울 리 없다.
사람이 어느 한 가지 입장에만 빠진다면 심하게 허우적거릴지라도 자살까지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의식이 머리와 가슴을 함부로 넘나들게 될 때 보통 사람은 견디기 힘든 고통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혼란이 착란이란 한계에 다다르는 경우 사람은 비로소 자살적 충동을 받는다. 실제 우린 가끔씩 이런 순애보를 전해 듣기도 하니까, 긴 시간을 두고 동서양의 문학 음악 미술 등 무수한 예술 작품들이 이런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걸 보면 가볍되 사소하지 않은 그의 의미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젖어드는 추억은 커피색처럼 진하다. 색만 진하지 한숨 한 스푼에 온기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다. 무심한 사람들이 미처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단맛은 식은 커피가 더 달다. 시간도 우려 넣고 한숨도 우려 넣고 빈 눈길로 오래 휘저었으니 마냥 우러난 커피가 더 단 건 당연하다.
맘껏 주고 싶은 게 사랑이면서도 죽기 전에 진정한 사랑을 꼭 한번쯤 받아보고 싶다. 언제나 한결같기를 갈망하면서도 늘 변하는 게 또한 사랑인 듯, 사랑은 자 의지를 피해 제멋대로 흘러가기 일쑤다. 처음엔 잘 모르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희망하고 간구하는 대로 흐르지 않기 일쑤다. 역시 피치 못할 상대성이기 때문일까?
감정이 사랑의 포로가 되어 의지를 앞서갈 때 우린 드디어 사랑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거의 모든 사랑이란 거기서 환희의 절정을 알게 만나고 동시에 모르게 고비도 시작된다. 결국 ‘황홀한 오해’가 사랑의 보편성이라니 꿈같이 달고 짧은 황홀함이 지난 뒤 갈데없이 남겨진 오해의 쓴맛은 고스란히 현실이 되고 만다. 달콤한 커피 속맛이 사실은 쓰데 쓴맛인 것처럼, 사랑의 달콤함은 알아도 그 번뇌는 모르는 자, 그들을 우린 철부지라 한다.
마저 비우지 않으면 안 될, 끝장까지 바닥이 보이지 않는, 한 모금 남은, 칠흑같이 깊고 어둡고 식은 커피 잔을 들여다본다.
사랑처럼 보이는데 사랑이 아닌 것도 많다.
뜨거울 때 사랑이 식어지면 미움 되기도 한다.
그토록 정형도 없는 사랑의 모양새에 우린 엄청난 집착을 한다. 사랑이란 역시 살아있는 생물에게나 허락되는 생명의식이니까.
사람을 크게 성장시키는 사랑이면서도 사람을 일거에 망가뜨리는 능력도 있다. 사람에게 가장 큰 행복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눈물을 요구하기도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난 다신 사랑을 구하지도 탓하지도 않겠단 굳은 속다짐을 했었다. 그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렇게 다시 사랑타령을 뇌까리고 있다. 내가 한심하단 걸 나도 안다. 어쨌든 누구네 맘이 열려만 준다면 그래도 난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 아직은 살아있고 사랑은 산 자만의 특권이라니까.
비밀하나, 누군 가슴앓이를 아예 품고 산다. 제대로 고약한 계절과 만나면 병이 도져 죽음 직전에까지 이른 적도 있다. 그걸 핑계 삼아 다 비워진 찻잔에 이번엔 술 한 잔을 가득 채운다. 지옥같이 짙고 검었던 속내가 천국처럼 말갛게 찰랑거린다. 무심코 들여다본 표면에 어떤 사내 하나가 어른거린다. 멈추면 그만 퐁당 빠져 버릴 것 같은지 잘디잘게 흔들린다.
사내에겐 언제까지나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가 있다. 선한 의지만 가득한 세계에도 왜 어두운 그늘은 줄어들지 않는가, 라는 거.
말하기 좋게 동전에도 양면이 있고 양지에도 음지가 있다고 한다.
그림자처럼 이유 없는 고난도 분명 존재하는 게 세상이라고 한다.
무던하단 표현은 세상사의 무책임, 부조화를 인정하는 것처럼 들려 한사코 거부한다. 원칙과 질서만 지키면 아무런 찌그러짐이 없어야 하는데 세상사 흐름이 반드시 그렇진 않단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런 맘속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사낸 일상을 탈출하고자 위험한 시도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단다.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이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용케 탈출한 곳도 역시 세상의 한 귀퉁이였고 모양만 달리한 부조화가 똑같은 크기로 감춰져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도 마찬가지, 어느 곳이든 온전히 대피할 수 있는 장소가 이 세상엔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저 말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사내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안다. 고통이 오래되면 병 된다는 사실까지도 겪어본 그는 안다.
수많은 허구와 무지에 둘러 쌓여있어도 참을 수 있었다.
의지와 희망을 유보 당하는 것도 참을 수 있었다.
자존심 양보도 의무란 이름 아래에선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다만 간신히 하나 남은 사고의 자유마저 다른 이의 경박함에 의해 탈취 당하는 마지막 비인간적인 모습은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마저 참아서 미래가 보전된다면 또 모를 일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흔의 크기는 종류와 함께 더욱 늘어날 뿐이었다니까.
파격, 그랬었다. 기득한 제 삶의 격을 깨뜨리는 방법이 그나마 외부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고 사내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관건이었다. 무작정의 인내와 양보도 길은 아니었고 세상을 탈출해 봐도 소용이 없었단 엄연함 앞에서 결국 사낸 격을 깨뜨림으로서 스스로를 구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단다. 격을 깨고 보니 모든 기득이 세간의 허구.
즐거움과 쾌락이 삶의 궁극적 목표일 수도 없었다. 유희란 수고의 대가로 주어지는 일시 허여된 소모성 축복일 뿐, 자체로선 누굴 살찌게 하는 요소는 못되는 것, 이유 없는 일방적 즐거움이란 탐닉과 같아서 고마움의 한계선을 모를 뿐, 심상의 샘터에 정화된 요긴함이 고일 틈을 자꾸 앗아가 버리기 마련이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큰 수고 뒤에 주어지는 보답의 일부로서 아무리 작아도 크며, 이조차 감하고 미룰 수 있다면 이는 가장 크다.
만일에 대비해 어떠한 즐거움이라도 가능한 짧게 끝내는 아픈 버릇이 사내에겐 생겼다. 어차피 산자이기에 예비 된 숙명이고 겪어야할 고통이라면 가슴이 비어있는 상태에서 찾아오는 건 얼마든 참아낼 만큼 연습도 준비도 되어있으나, 즐거움에 들떠 한껏 상기된 상태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통증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잔인한 일일 테니까.
맑았던 잔도 비워졌다.
사내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