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갈 저녁 한 때

조회수 10501 추천수 0 2013.10.01 18:10:07

(갈 저녁 한때)

 

봉선화.jpg

 

  이즈음 한 달 넘어 비가 없었던 마른 들녘을 가까이 지나칠 때면 바싹 마르라고 밭 가운데 베어 세워놓은 들깨더미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에 온몸이 절로 살쪄짐을 느낀다. 그럴 땐 일부러 지나치는 속도를 뚜욱 떨어뜨리고 깊은숨이나 자주 들이킨다. 길지 않은 지금 이 계절 향기로 다가오는 짧으나 지극한 축복이다.

 

 

이 계절이라면 어디 건 전국이 마찬가지겠지만 빈 곳 여유가 있는 도시변두리 포장도로변은 졸지에 내놓고 펼친 나락 말리기로 연중 가장 비싸고 바쁜 곳이 된다. 덕분에 편도 2차선 도로가 1.5차선으로 줄어도 내 보긴 서둘 일 없음에 도리어 안전할 뿐 그저 좋게만 보인다.

  아무리 도로교통법 상엔 위법 투성이라지만 누가 보건 말건 어느 차 한 대라도 함부로 나락을 밟고 튀겨내며 무심으로 지나가는 경우를 흔적을 난 아직 보질 못했다. 돌아보면 아직 남아있는 논배미에도 추수를 기다리는 벼들이 얼마 남아보이지 않음은 알겠으되, 네 것 내 것도 알 바 없이 보는 이로서 각자가 쥔이 되고 차마다 빈 바퀴로 참여하는 도시변두리 포장도로 진솔한 알곡축제가 좀 더 길어져도 배부른 가을이라면 마냥 좋겠다.

  역설도 하나 숨어있으니 곳곳에 자리 잡은 제 철 허수아비들도 제 짧은 역할기간을 얼마 남기지 않았단 말과도 다름이 없겠다. 다 쓰고 버려졌다 곤 차마 말할 수 없을 테지만 철지나 눈길도 더는 돌려지지 않는 썰렁한 겨울 벌판에 삐딱하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알만한 이들, 관심이 남아있는 각별한 이들이라면 그의 전설을 모를 리 없으리라.

 

  공중을 가득 점령한 채 짧은 계절을 힘껏 구가하는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잘디 잔 날파리들 등쌀엔 스쿠터로 전진은커녕 눈뜨기도 숨쉬기도 힘들만큼 심히 방해를 받기도 한다. 참말로 하루, 길어야 이틀에 불과한 이들의 수명을 모르지 않기에 눈엔들 코엔들 아무 곳에나 함부로 안개처럼 달려들어도 녀석들의 공간을 무단히 침입한 내 탓인 줄을 알기에 불평타박일랑 드러낼 수가 없다. 올 가을 들어 유난히 극성이 심한 이유도 긴 가뭄 덕택에 하루뿐인 짧은 수명이나마 한 번도 방해받지 않고 기하급수적으로 수를 늘린 때문일 것이라 사료된다. 그저 구름 같이 무성한 하찮은 미물일 뿐인 날파리라도 제철 한철을 두고 말할 때 하늘이 흥망성쇠의 가름을 해줌이랄 수 있다. 이처럼 무릇 생명이란 귀천을 가림 없이 똑 같이 하늘의 지엄한 생사유전규칙에서 한 치의 어김도 없을 따름이다.

 

  야생의 들녘과 인공의 정원을 가리지 않고 소국, 산국, 감국 등 국화꽃 종류도 바야흐로 절정에 들기 시작했으니 서리 내리고 흰 눈이 내비칠 즈음까진 생명으로서 살아있는 표식을 곱다시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잘하면 첫눈에 하얗게 덮인 야하데 야(野)한 국화네 초상 한 장쯤을 얻어 들일 수도 있으려나 몰라. 그리하여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고고한 흥취에 한때나마 젖어볼 수 있으려나 몰라.

 

  이화리에서 산유리로 넘어가는 갈치고개 단풍은 오늘부터 절정으로 치달리는 모양이다. 눈길이 닫는 산록마다 얼룩얼룩한 자취들이 다급하게 너비를 넓혀가고 있음이니, 역광으로 투과되는 좋은 위치에선 실루엣 그의 명료함이 점차로 영혼을 끌어당기기 시작하더라.

  수삼일 내로 녹음바탕 만산은 홍엽으로 황갈엽으로 온통 점령당하고 말 테니 여기 이것이나 놓치지 말았으면 그뿐, 다른 곳 더 좋은 단풍소식은 멀리서 풍문으로 전해 듣기만 해도 나는 좋겠다.

 

  못된 것, 저녁 그러매가 깊어진다 한들 아직 어둡기도 한참 전인데 ‘휘융’ 저편 도심 메마른 가로를 힘들여 거쳐 왔을 갈바람 한줄기 불어오는가 싶더니 ‘덜컹’ 갑자기 애먼 내 심장 한 덩이 쑥 베어 물빛 짙은 강 복판으로 내쳐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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