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킹 벌판에 눕다.)

 

겨울이래도 12월 초순은 아직 견딜 만합니다. 가뿐하게 스쿠터를 몰고나가는 아침, 어느 기발하고 천진한 님의 발상인진 알지 못하지만 어찌 아닌 낡은 마네킹 하나가 하필 들녘 논두렁 한가운데 쓰러져있었습니다. 그간 몇 번쯤 멀리서 눈에 뜨이긴 했었지만 “보매 좀 그렇지 않나?”하며 일시 생뚱맞게 여길 뿐 그리 깊이 유념치 않았었습니다. 일부러 가져다 놓음이 아닐 바에야 헛되이 힘들여 가며 거기 논두렁 한복판까지 들고 들어가 내버릴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허나 이번 참엔 아무래도 가까이 다가가 정황을 좀 알고 싶었습니다.

옳거니, 아마도 가을한철 약아빠진 참새 쫒기로 용도 폐기된 마네킹을 허수아비 대신한 모양이지만, 이젠 새 쫒기 역할마저 끝난 탓에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로 그냥 그렇게 내놓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주 쏘다니는 이웃 논둑에서 찾아낸 워낙 의외롭고 시니컬한 정경이라 깊은 뜻도 없이 사진이나 예사롭게 한방 박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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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몇날 며칠이 지나도 낡고 딱한 마네킹 허수누이는 벌판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내 의지와 시각은 조금씩 각별하게 눈여겨보기 시작했습니다. 도리랄 것까지야 없겠지만, 아무리 플라스틱 석고상 무생명체 소모품이랄 수 있는 일개 인조마네킹이라지만, 분명한 인간의 형상에다 한때는 깔끔하게 단장된 진열장 안에서 숫한 시선들을 끌어 모았을, 그것도 화장기조차 지워지지 않은 아리따운 누이가 이제 꺾이고 헐벗은 모습을 보이고 있을 바에야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음입니다.

 

어느 날 눈이 녹자 마침 아래 널려져있는 포장용 보자기가 엿보였기로 슬며시 걷어 올려 들판을 휘감고 도는 막급한 겨울추위를 가려주는 척이라도 해야 맘이 편할 듯싶었습니다. 시야에서 피할 도리 없이 오가야하는 길목 언저리에 하필 버려져있을 바에야, 불가피한 인식이 일단 쏠리고 말았음에야, 깊은 생각에 앞서 더운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냥 그렇게 해주었거니 비로소 꿈속에 나타나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내어줍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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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를 마저 고백하자면 거기 기왕에 널려있었기에 한손쯤 걷어 올려 부끄러움과 한기를 아울러 가려줄 순 있겠어도, 내걸 일부러 가져다 덮어줄 아량까진 자신할 수 없습니다.

 

평소에도 오가는 차량이 뜸한데다 특히 본판의 겨울이면 고스란히 빙판이 지는 가파른 북향인 탓에 두 바퀴 스쿠터에겐 아주 위험한 한데 길이기에 자주 쏘다닐 일은 못됩니다. 하지만 옷도 아닌 한갓 보자기나마 한 춤 추슬러준 한 달여 뒤 밤중을 빌어 다시 들녘에 눈이 쌓이고 궁금증을 내칠 수가 없었으니, 이번엔 차디 찬 들판에 애오라지 혼자 누워있을 허수누이를 찾아보기 위해 아침 산책코스를 그곳 위험한 벌판으로 일부러 잡았습니다. 역시나 처음처럼 입성이 딱해 보이지도 않았고 표정조차 제법 평온 늠름했으니 적이 안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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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차디 찬 겨울도 정월달 아침녘의 냉기는 빙점하 10도에서 한참 더 아래로 내려가 만사를 꽝꽝 얼게 하는 가운데 “아하!” 유독 허수누이의 얼굴에서만 뚝뚝 떨어질 정도로 땀, 진땀이 흥건히 흐르고 있는 중입니다. 이야말로 온통 알 벗은 모습을 살짝 가려준 약간의 능동적인 친절 덕택이라 치부해도 부인하지 못할 가히 흥미롭고 깜짝 놀랄만한 정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돌아와 준 생명의 온기려니, 선뜻하기는커녕 알 수 없는 환희 한줄기가 가슴 언저리를 잔잔하나 뜨겁게 휘감고 돌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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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온 겨울을 꼬박 한데 들판에서 홀로이 지난 다음 봄날이 채 되기 전에 허수누이는 불연 듯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햇살 좋고 인심도 다정한 곳으로 분명히 옮겨갔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젠 잊기로 했습니다.

잠깐의 틈바구니 이승에서의 소풍 중이란 내 짧은 생애 중 어느 한해 겨울, 치열했던 강마을에 한 시즌, 추수가 끝난 빈 겨울들녘을 일시 스쳐갔던 작은 오브제, 희미한 해프닝 일장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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