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가을 단상

조회수 18668 추천수 0 2012.01.16 04:37:35

(가을 단상)

 

찬란한 태양의 축제에 끼어들어 활기 가득하게 보낸 나날들에 대한 보답으로 알차게 맺은 자신의 열매를 땅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결실나무는 그래도 덕이 있는 셈이다. 요 며칠 사이에 풀빛은 제 색깔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짙게 푸르던 밤나무 잎새가 윤기를 잃고 다소곳이 먼저 고개를 떨군 것이다. 가지 꼭대기 일부에 힘들게 남아있는 늦밤송이 몇 알갱이만 흐르는 계절을 안타깝게 지키고 있다.

 사진101005 022.jpg

사람들은 저마다 가을걷이에 부산한 시간, 틈틈이 모아 두었다가 가끔씩 들르는 이웃들에게 양껏 나누어 들려 보내고도 남은 알밤이 다시 한 바구니를 넘었다.

토종다람쥐 녀석들도 풍성한 제철을 만나 발걸음이 나보다 더 부산하다. 기운이야 내가 한참 셀 것이니 마음만 먹으면 한 톨의 알밤도 남겨놓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차마 그럴 순 없는 일, 서운하지 않을 만큼의 알밤을 이곳저곳에 남겨둔다는 성의가 오늘 아침엔 그만 허망무색해지고 말았다. 어제 오후쯤에 길을 지나가던 여행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싹쓸이를 해가 버린 것이다. 미리 알았다고 해서 주워가지 못하게 악착같이 말리진 않겠지만, 힘들게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가시넝쿨 밑에까지 파고 들어가 저처럼 깨끗이 비워두게 하진 않았을 텐데, 거긴 토종다람쥐와 나 사이에 불 침범 경계선으로 은밀히 밀약을 맺어놓고 양보해 주고 있는 지역인데 말이다.

밀약이긴 해도 다분히 일방적이다. 덩치가 크고 기운이 다소 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만 지키면 그만인 일방적인 약정인 것이다. 따라서 워낙 알이 굵어 입주머니에 들어가지 못해 차마 가져가지 못하고 아무 곳에나 껍질을 홀랑 까놓은 채 한 입만 살짝 베어 물고 내버려둔 얄미운 행위까지도 양해를 해준다.

하긴 다람쥐네 겨울철 동면용 먹거리까지 배려할 수 있는 사려 깊은 여행객이란 생각하기 어려울뿐더러, 겨울철 다람쥐 입장에 대해 구구히 말로다 이해를 구하기도 난처한 일이다. 그에 못지않게 서운한 일은 덕만 가득하지 아무 연유도 죄도 없는 밤나무가지를 함부로 꺾는 경우이다.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휘늘어진 밤송이들은 누가 봐도 하늘 한가득 풍요롭게 보인다. 생판 콘크리트 천지에 묻혀 사는 도시인들에게 제 속을 알알이 다 들어낸 눈앞에 광채 영롱한 밤송이들은 가히 충동적이라 할 만큼 마음 한편을 강하게 자극하기 마련이다. 자극은 시각적으로만 그치지 않아 기어코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소유욕이 함께 발동되어버린다. 욕구가 다소곳하면 그마저도 참아줄 수 있다. 하지만 한번 발동된 탐심은 과장되기 일쑤이고 숨겨져 있는 잔인성이 바깥으로 함께 표출된다. 처참하리만큼 나뭇가지들이 함부로 찢겨나가고 뒤에 남겨진 처연한 모습에 이번엔 내가 충격을 받는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흉 되지 않도록 잘 골라둔 가장 튼실한 알밤을 비닐봉지에 절반쯤 따로 넣어두고 인연이 닿는 여행객들에게 나누어줘 풍요와 미소를 함께 전달해 준 경우도 몇 번은 되는데, 나도 미처 모르는 틈에 찾아와 보호구역까지 넘어서 털어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알밤군.JPG  

멀리 창밖에서 부르릉거리던 차량 엔진소리가 이유도 없이 뚝 멈추거나 인적이 언뜻거리면 난 상황을 쉽게 짐작하고 천천히 채비를 한다. 적당한 비닐봉지에 따로 골라둔 건강한 알밤 한 되 가량을 주섬주섬 담는 것이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일부러 내는 인기척과 기침소리를 앞세워 그들에게 다가가면 아니나 다를까, 십중팔구는 부러진 나뭇가지에 올라가 설익어 채 벌어지지도 않은 초록의 여린 송이, 아직 버틸 힘없는 밤나무가지들과 한바탕 씨름을 벌이는 중이다.

섬뜩 놀라는 표정도 가지가지이다. 그런 그악스런 사람들의 공통사항이란 괜한 흰소리로 저들의 알밤서리하다 들킨 상황을 얼버무리거나 뒤덮으려 들기 마련이다. 거기엔 성인이건 젊은 층이건 예외가 없다. 설사 밤나무골 주인일진 몰라도 초라한 차림의 갈데없는 산골짝 촌부인 내게 던져지는 말투에도 성의란 한 점도 들어있지 않다. 따라서 어떤 소리이건 난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들의 난처한 입장을 표 안내고 강조하지 않으려 내 쪽에서 먼저 웃으면서 유순한 여유를 먼저 건네준다.

“날씨 그만이지요?”

“저것 좀 보세요, 알이 얼마나 굵은지 우리 애들 머리통 깨뜨리겠어요!”

말끔하고 점잖은 서리꾼들의 표정엔 굳은 경계심이 사라지고 순한 황송함이 금세 가득히 퍼진다. 그런 홍조 띤 표정을 기껍게 바라보며 알밤봉지를 앞으로 내밀면 누구라도 얼른 이해하지 못한다.

“올해 추수한 햇밤인데, 좀 나눠드릴게요”

결실이 딱히 필요해서라기 보단 절반은 운동 삼아 알밤을 하루에 여러 번이라도 자주 주워 모으기에 땅에 알밤이 고여 있을 시간이 거의 없음은 사실이다. 결국 알밤서리 빌미의 일부를 내가 제공해 준다는 점도 내심에서 인정하지 않을 순 없음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부러 두터운 풀을 베어 넘겨 알밤이 떨어질 자리를 미리 봐둔 수고로운 자취를 보면 가꾸고 기대하는 임자가 따로 있음을 모르진 않을 텐데…….

어른들은 하나같이 알밤봉지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사람도 거의 없다. 작아도 빠르게 자리 잡아가는 그들 풋풋한 양심에 일개 알밤봉지는 보답이 되고도 남는 겸허한 계절적 은혜가 된다. 난 그 모습이 반가워 아무것도 아니란 듯 태연하게 손을 이끌어 쥐어준다.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없다. 아니 최면에 걸린 듯 거부하지도 못한다. 알밤이 어디 귀하고 특별해서 그렇겠는가?

 

만약 일행 중에 아이들이 있다면 양상은 또한 달라진다. 알밤서리의 면구스러움은 잠깐이지만 반가움과 안도감을 감추지 못해 순박한 감성이 금세 밖으로 표출된다. ‘까르륵, 와르르’ 녀석들 웃음소리에 가을하늘은 그렇지 않아도 희고 아득한 뭉게구름을 밀고 한층 더 높이까지 일로 솟구쳐 오른다.

이럴 땐 어른에게 알밤봉지를 들려주는 게 아니다. 당연히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눈치에 때 묻지 않고 이율계산에 서툰 동심들이 마냥 솔직 담백하기에 어른들처럼 쭈뼛거리지도 않는다. 둘이면 둘, 넷이면 넷, 작은 꼬마 손들이 있는 대로 불쑥불쑥 앞으로 튀어나온다. 가지런한 그의 끄트머리마다 활짝 펴진 단풍잎을 꼭 닮은 손, 손, 손들, 여리고 뽀얀 다섯 장 잎새들이 얼마나 다정하고 예쁜지 모른다. 그럼 난 일껏 내밀었던 손을 뒤로 슬며시 도로 빼본다.

아하! 천지 동심원에 가을날 초록빛 은총이 가득차고 다채색 단풍의 화사함도 만면에 넘치는 순간, 누구랄 것도 없이 서러울 정도로 푸르다 못해 시린 가을하늘의 포로가 되는 순간, 어른이건 아이이건 만산에 가득한 가을빛에 풍덩풍덩 빠져들어 제 풀에 알밤이 ‘와르르’ 쏟아지고 마는 바로 그 순간에 나까지 하나로 몽땅 함몰되고 마는 것이다.

 

원처에서 방문한 귀한 인연을 작은 접대로 정성껏 포장해 고운 추억과 일단의 미소와 함께 곱다시 되돌려 보낸다지만, 감출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손님들의 흔적, 갈데없는 서리꾼의 소행은 밉다시 내 몫으로 남는다. 저간의 자세한 영문을 알 리가 없는 이웃한 토종다람쥐 녀석들은 필시 내게 고스란히 원망을 돌릴 것이다. 몇 년 동안 사람 얼굴이라곤 거의 내 얼굴 하나만 바라보고 자랐을 테니 말이다.

 크기변환_다람쥐 아침.JPG

(인정머리라곤 다람쥐 눈곱만큼도 없는 정녕 잔인한 이웃 같으니라고)

(제 스스로 정해 놓은 약정조차 쉽게 무너뜨리는 역시 못 믿을게 인간이라고) 거참!

 

토종다람쥐 먹거리가 산골짝 천지에 비단 알밤뿐이겠는가, 흔한 도토리도, 고염열매도, 잣도 있고, 여타 다른 결실들도 발길이 닿지 못하는 산 속 우거진 여기저기에 아직은 넉넉하겠지만, 최소한 내게 돌아올 오해만은 일간 풀어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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