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종류는 가리지 않고, 맛은 강하지 않게, 양은 넘치지 않도록 유지하는 원칙이 자연스럽게 잡혀있다. 심보 하나를 바르게 갖기 위한 일상 정비가 의외로 건강까지 바로잡아주는 역할 됨을 난 고맙게 느끼고 있다. 비우고 양보함으로서 되레 크게 얻어진단 사양지심(辭讓之心)의 원리를 난 실상에서 분명하게 구현한 것이다.
식성이 이럴진대 잠드는 시간도 하루 3시간을 넘기는 적이 거의 없다. 물론 일부러 잠을 아껴가며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노골적인 움직임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갖는 주변산책 뿐이지만, 수년 동안 혼자 지내면서도 일없어 심심하단 느낌을 가진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몸이 특히 불편해 견디기 힘들 때를 제외하면 낮에 자리에 눕는 경우도 없다. 졸리면 자고 졸리지 않으면 고맙게 알고 마냥 깨어있을 뿐이다. 과로를 피할 수 있는 여건은 이유가 되겠지만, 잠이 크게 줄어든 것이 꼭 나이 탓만은 아니다. 섭취되는 음식물의 양이 대폭 줄었기로 신체 내부 장기가 혹사를 면한 덕분에 자가 회복을 위한 깊은 휴식의 필요성이 덜어진 탓임은 분명하다. 이러니 입하나 덜어냄에서 기인한 이점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란 대목에 특히 큰 강조점 하나 ‘꾸-욱’ 찍는다.
음주도 마찬가지, 감정이 간절하게 시킬 때면 스스럼없이 혼자서 소주 한두 병 마신다. 전엔 앉은자리에서 너 댓 병의 소주도 문제없이 소화를 시켰지만 지금은 의식적으로 양을 줄인다. 이틀 정도 밤새워 무거운 글과 씨름을 한 뒤엔 더더욱 그러하다. 복잡한 사념을 떨쳐버리고 쉬이 잠들기 위한 도우미 역할인 것이다. 남들과의 주석을 일부러 꺼리는 걸 보면 술에 처지를 의존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어차피 나와 한두 번 대작을 한 위인들은 모두 몸을 사릴 정도로 주량의 면에선 추종을 불허하기도 하거니와 의미가 자꾸 축소됨이 가장 큰 원인이다. 종류와 양을 불문하고 반가움을 안주 삼아 대작할 호쾌한 인사를 근래엔 만나지 못했음이고, 내키지 않으면 한 달이건 두 달이건 술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한동안 충분히 절제하고 양보를 했단 판단이 들면 아주 가끔씩은 누구와 어울릴 때에 한해서 약간 무리를 해 술을 마시는 경우는 있다. 기왕지사라면 유쾌하게 즐길 뿐 횟수는 늘 염두에 둔다. 난 아무리 취해도 태도가 꼿꼿할 뿐, 남들이 질리는 이유도 사실은 거기에 있다. 그러한 기회조차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의식적으로 삼간다.
생선회를 좋아하기에 두어 달에 한 번씩은 큰맘 먹고 읍내 단골 어물전에서 회를 떠온다. 소주 두어 병과 함께 혼자 즐기는 고즈넉한 자리에서 참으로 안온한 기쁨을 느낀다. 물론 그럴 만한 일을 반드시 성취했어야 만하고 회와 외식은 결단코 겸사하지 않는다. 배가 부르면 회 맛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기왕에 소식으로 작아진 위장, 배 터져 죽는 가장 멍청한 경우는 피하고 싶다.
정신력의 가치만 유난히 강조하는 건 아니다. 다만 무수한 오해와 관습으로 굳어진 섭생 습관과 생존의 무게를 유연하게 가짐으로서 보다 뜻 있게 사는 방법을 함께 강구하고자 함이다. 숫한 선입견과 오해 때문에 하나뿐인 육신이 보장은커녕 남의 일처럼 혹사당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식습관이란 결코 필요치 않은 용어다. 편식이 가장 무거운 습관일 뿐 자연스러움을 유지함이 좋다. 움직임과 일의 양에 따라 몸에서 요구하는 대로 따르되 다소 감한단 자세는 가장 긴요하다. 배고프면 골고루 먹고 고프지 않으면 먹지 말일이다. 불가피 바깥과 어울릴 때 권유에 의함이라면 몰라도 습관적 포만은 여러모로 좋지 않은 결과를 틀림없이 예약할 뿐이다.
집안의 유전적 내력이든 어떤 이유든 편식은 일방으로 넘쳐서 해악이 되는 경우와 나란하게 한편의 모자람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두 배로 해악이 누적되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영양소의 결핍은 인성에 직격적인 영향을 가져 온다. 편식은 즉 편집적인 인성을 나타내기 마련이니 난 편식을 입에 올리는 인사들과는 큰일을 결코 도모하지 않을뿐더러 미래를 깊이 신용하지도 않는다. (계속)
*자연수상록 '한 스푼'(어문학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