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잡석에 대한 단상

조회수 13276 추천수 0 2012.11.12 23:19:36

(잡석에 대한 단상)

 

산골짜기에 들어와 몇 년을 혼자 살다보면 만 가지 것들이 사전 전제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사심도 없이 제 가치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일 때가 있다. 비교할 필요성도 다중의 눈치 볼 일도 없으려니와 기존의 상식, 통념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극적인 일도 예사다.

귀해서 제 가치를 더욱 드러내는 것들도 없지 않으나, 흔하고 흔한 존재들의 묻혀있던 참가치가 비로소 드러나는 그런 경우야말로 발견 중에 최고의 쾌재라 아니할 수 없다.

물 자체의 본질보다 한갓 타산성이 개입됐기 때문이려니, 기성의 앎들이 일거에 편견이 되어 나가떨어지는 것도 예사고, 당연한 원천의 진짜와 진짜처럼 보이는 인공의 가짜가 확실하게 비로소 제 정체를 곧장 드러내는 것이다.

 

며칠 전 용처가 정해지지 않았기로 숲 속에 그냥 감춰뒀던 산삼 중 하나를 큰맘 먹고 기어이 서재 책상 위로 옮겨왔다. 절기로서 처서를 지나 1년간의 노고를 잘 끝낸 합당한 시기까지 그냥 제자리에 놔둬도 상관없겠으나, 완전히 놔버리지 못할 불안함까지 억지로 참아가며 자연계의 흐름에 맡겨 둘 일은 없었다. 때문에 주위 변동으로 거의 노출이나 다름없이 홀랑 드러난 신4구 하나만 일단 먼저 회수하기로 맘먹었다. 주변에 가득한 새 노루 발자국은 결정적인 결단의 동기가 됐다.

산골짜기에서의 걱정과 희망은 사람의 맘먹기에 달린 게 아니라, 주관이 자연이고 대상이 야생인만큼 자연계의 엄정함이 먼저 좌우하기 마련이다. 쉽지 않은 야생산삼의 생체이식기술에도 스스로 자신이 있었거니와 미래를 지향한 특출한 희망 전령사 용도로서 안정감을 확실하게 확보해야 할 필요가 하나쯤은 있었다.

이번까지 네 번째 심 돋우기였으나 하나를 제외한 세 개의 심은 모두 생체이식을 성공적으로 이행한 경험이 있었기에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그간의 지식과 다루기 요령으로 충분하리란 판단이었다. 가장 작은 하나도 처음부터 온전치 못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당연히 생체이식을 했을 것이지만, 이미 발견될 당시부터 종말이었을 정도로 워낙 피폐한 상황이었기에 생육을 무리하게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고한 산삼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사라질 땐 깔끔하게 사라지는 편이 나았으니까.

 

숙고와 정성을 총동원한 끝에 옮겨진 약 20년 생 4구5옆 청년기의 지종 방울형 삼은 숲 속 못지않은 건강도를 내 책상 위에서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발견 후 열흘이 지나 5월도 하순으로 접어든 이즈음 일곱 개의 꽃망울 중 첫 번째 녀석이 드디어 흰빛 속살을 내보이며 개화를 시작한 것이다. 돋보기도 굵은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별꽃 모양으로 백색에 가까운 연녹색 꽃망울이다.

하지만 막상 이 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귀하다 해서 산삼 이야기가 아니다. 주방에 가지고 있던 것 중 가급적 큰 걸 골라 임시로 마련한 값싼 반투명 플라스틱 반찬 그릇이 어처구니없게도 귀하데 귀한 산삼을 수용하는 화분 역할을 대행하고 있음도 아니다. 분재 화분의 흙 표면에서 들러리라면 들러리랄 수 있는 한갓 잡석, 투박한 산돌맹이에 대한 깊은 생각이 그것이다.

 

산돌은 말 그대로 잡석이다. 특별히 가공되지도 않았고 물돌이나 차돌처럼 길게 물길에 시달린 나머지 잘리고 갈리고 닦여져 적절한 모양새로 다듬어져 있지도 않다. 오다가다 발에 채여 아프게나 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존재, 귀찮으면 귀찮음일 뿐 다시 뒤돌아보지도 않을 길바닥과 산천에 내 깔린 그저 한갓진 돌멩이일 뿐이다.

돈 들여 일부러 사오는 물건이 아니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일껏 내다 버려야 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서 내 뜨락 주변은 강원도 감자바위로 소문난 산골답게 흙보다 돌, 잡석이 훨씬 더 많다. 밭이라 해도 돌밭이다.

이처럼 무가치에 가까운 잡석이 깜짝 놀랄 만큼 멋진 모습으로 변모, 의외의 제 역할을 찾아 행사하는 경우가 있다. 원래 없었던 모습이 아니라 일체의 가공도 필요 없는 거칠게 생긴 자연스런 모습 그대로를 말함이다. 이리저리 고를 필요도 없이 아무 것이나 손에 집히는 대로 주워 올리기만 하면 그만이란 말이다.

다소 여유를 부려 보느라 소일 삼아 뜨락에 내 깔린 잡석을 무작위로 여 나문 주워와 산삼 화분 표면에 적당히 세워 놓으니 나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완벽한 아름다움이 발현됐던 것이다. 바로 조화 야생의 극치미라 아니할 수 없었다. 단독으론 그저 무가치한 잡석이 귀한 심과 공존함으로서 기막힌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참숯도 꼽아보고 마른 나무도 새워보는 등 물기가 자연에서처럼 흐르지 않고 멈춰있는 화분의 활성화를 위해 천연의 물 펌프로 삼아보고자 함의 의도가 있기는 있었다. 물과 돌의 인연으로 형성되는 바로 석수지연(石水之緣)의 묘미를 찾고 내 안에서 구현해 보고자 했음이랄 수 있었다.

석수지연의 동기가 아닌 그의 결과로서 비교적 조직이 여린 부분은 숫한 시련에 의해 다 떨어져 나가고 강건한 부분만 남아있는 물돌 차돌 즉 수석은 이런 경우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리란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잡석은 있는 그대로 자빠뜨려져 있으면 10% 정도를 제외하면 제 가치가 쉽게 찾아지지도 발현되지도 못함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변 잡석이다. 그러나 자세를 바로 세워 일으켜 주면 이번엔 아무렇게나 손에 드는 잡석의 90% 정도가 모양을 갖춰 내면에 잠들어 있던 역할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발휘해 준다. 나머지 세워지지 않는 불과 10% 정도만 참말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잡석, 대책 없는 돌멩이로 남을 뿐이다.

약간의 요령이 생기자 쓰임이 끝난 낡은 칫솔을 이용해 돌멩이 표면의 흙을 닦아낼 줄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운이 좋으면 아무리 작은 돌이라도 저절로 이끼가 붙어있는 것도 짐짓 의식하게 됐다. 당연히 털어냄이 아니라 분무기로 물을 뿌려 일부러 보호할 줄도 알게 됐다. 중요치 않으니 여러 날 잊고 물주지 않아도 바짝 마른 채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 물만 주면 다시 녹음을 되찾는 끈질긴 생명력이 그저 고맙고 기꺼울 뿐이다. 영문을 모르는 이들이 보면 애먼 산 돌멩이 잡석에다 물 준다고 오해할 것이나 일일이 해명하고 싶지도 않다.

일개 잡석이 분재 화분 위에서 이끼와 심과 함께 3박자를 이뤄 대자연의 의지를 빠뜨림 없이 표현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고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속세간의 기준과 잣대로는 어림도 없는 아름다움이며 무공해 순수 공식이 그 속에 깃들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늘 거기 있었던 새로운 미학이었으며 평범한 속에 깃든 경악이었다.

모든 게 만족함도 아니었으니 이곳 잡석에 다소 부족한 점이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바로 색상의 단순함이다. 누런 황토색으로 일률적인 돌들 사이에서 모양으로 고르는 게 아니라 색상으로 고르는 정도의 수고가 새로 생겼음이며, 얼룩이 돌도 그렇거니와 반짝이 운모가 많은 돌도 그렇거니와, 하얀색 석영이 띠 줄로 들어있는 돌멩이라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형태미야 이미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으니 그저 거닐다가 눈에 약간 뜨이는 색상 정도에 유념할 뿐 정성을 넘어 승부를 걸고 찾아 헤맬 필요도 없다. 그로서 한결 완벽한 재현, 실상보다 더 우월한 입체적 표현도 가능하게 됐다. 더구나 주워서 들고 다니다가 귀찮아지거나 맘이 변해 그냥 내버려도 아까울 것 하나 없었다. 온 천지가 보석들이니 말이다.

 

수석이라 하면 사람들은 거의 틀림없이 냇가의 물돌을 이야기한다. 형태, 색상, 무늬 등 오랜 세월 흐르는 물에 갈고 닦여져 또 다른 자연의 위력과 변혁을 드러냄이다. 잘된 수석은 맘에서 우러나는 경탄을 저절로 불러일으키며 이 경우 수석은 한 덩어리로서 모든 표현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전혀 갈고 닦여지지 않은 흔한 산돌인들 표정에 있어선 수석에 못지않다. 두 세 개만 모아 세워놓으면 수석인 물돌보다 작품이 될 확률은 비교할 수 없으리 만치 높다. 일컬어 수석은 천 개 만개의 물 돌 중 한 개가 나올까 말까 하지만, 산돌은 그 어느 것이라도 여간해서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원 없이 깎이고 갈린 하류의 물돌과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을 뿐 전혀 갈리고 닦이지 않은 상류 산돌의 표현력이 모자람 없이 서로 빈곳에서 일맥상통한다 함은 원천의 내재적 가치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훼손되지 않는단 말로서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크다.

산돌에도 수석처럼 한 개로서 대자연의 표정을 말해주는 것들이 드물지 않다. 널찍한 접시에 물만 담아 돌을 띄워놓기만 해도 온 지구 풍광이 빠짐없이 수납된다. 조직이 덜 조밀한 산돌의 세로결과 틈새를 따라 펌프처럼 빨려 올라가는 물기의 진한 자취도 무시할 수 없는 한 줄기 언어가 되어진다. 입체감이 원체 명료하다 보니 이리저리 돌아봐도 느낌은 하나일지언정 표정이 같은 방향은 없다. 멀리서 보면 작은 동산이었다가 가까이서 보면 태산의 축약판이 주먹만 한 돌 그 하나 안에 모두 들어있다. 끝도 없이 아득한 절벽 단애가 손바닥 절반만 한 그 속에 감춰져 있다. 더 자세히 보면 부드러운 능선이 있고, 깊이를 알기 힘든 계곡 험곡도 있다. 돌멩이 서너 개만 세워 놓으면 대자연의 축약이 너무나도 쉽고 완벽하게 산삼 화분 위에서 찾아졌던 것이다.

수석 물돌에선 볼 수 없는 선뜻함 예리함의 직선성도 일절 어색하지 않았으니, 이점이야말로 개성과 표정이 거의 한 가지 방향으로 고정되기 마련인 물돌 수석에 비해 오히려 발군의 묘미를 함유함이랄 수 있었다. 게다가 내재의 기운이라면 온갖 시련을 아직 통하지 않은 원천의 산돌이 비할 수 없이 강렬하다면 누가 믿을 손가, 이같이 뜻하지 않은 산돌맹이들 내재율의 미학과 기상이란 참말로 놀라운 경이일 뿐, 결코 가벼운 소득이 아니었다.

 

바라볼수록 경치는 심에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 갈수록 잡석에서 찾아지고 있었다. 일단 먼저 눈이 가는 쪽이야 한창 꽃을 피우기 시작해 시간마다 모습이 표정이 달라지는 삼이어도 끝내 눈길이 오래 머무는 쪽은 잡석의 울퉁불퉁한 항구적인 표정이었다. 그때부터 산돌은 산에 있어서 산돌이 아니라, 살아있음에 산돌이었고 더 이상 한갓 잡석일 수 없었다. 깊숙이 숨기는커녕 단지 자빠져 있다가 일으켜 세워짐으로써 생명이 드러난 보석도 그런 보석이 없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보석, 하나하나가 인위적으론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원천의 보석이 되어졌다. 물질적 높은 가치로서의 진 보석이랄 순 없으매 내면적 깊은 의미로서의 순 보석이랄 수 있었다.

 

아무리 작아도 수수 만 년을 이어온 산돌의 의미를 유한한 우리 인간의 머리론 다 측량하긴 어렵더라, 늦은 봄날 물질로서의 산삼 발견에 못하지 않은 의미로서의 귀중한 세상 발견이었고 보편성 숨은 미학의 정점으로 가슴 뛰는 큰 발견이었다.

위대한 것은 원래 쉬운 곳에 깊이 감춰져 있기 마련이던가, 하매 타산으로 오염된 눈으론 쉬이 보이지 않는 건가, 한갓 잡석인 산돌에서 축약된 천지의 오묘함을 찾아낸 직관력의 행운에 진정 고마워한다.

아무려나 책상 위 조화 3박자가 청년기 지평을 힘써 구가할지언정, 난 갱년기 첫 깔딱 고개를 아프게 넘고 있다.

 

** 자연수상록 '한 스푼'(어문학사)에서 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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