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묘
빠른 가을의 상징 한길 가의 가로수 벚나무가 역시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배경의 산록은 푸르름이 아직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론 단풍에 낙엽이 벌써 가득합니다. 저 속에 살고 있는 나는 압니다. 나무들 아래로부터 한발 먼저 다가오는 가을, 색깔 물이 나무 위로 전파될수록 드디어 멀리서도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시작할 테고, 언제쯤 계절이 오거나 가거나 무심할 수 있을까요? 다른 계절이라면 몰라도 가을이라면 죽을 때까지 그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숲 속 담쟁이덩굴이 행여 감성에 부풀어 너무 일찍 벅차하는 무고한 이의 눈에 띄면 어쩔까! 속으로 혼자서만 빨간 열기를 앓아내고 있습니다. 해가 수도 없이 넘어가도 내성이 생기지 않는 가슴앓이, 오로지 시간만이 단방의 묘약일 따름입니다.
서재에 들어오니 북창 밖 억새가 기어코 속새를 틔워 내기 시작했습니다. 조만 간에 은백색에 이어 황금색 물결이 눈이 가 닿는 곳마다 파도를 이룰 겁니다.
결국 이곳에서 억새를 또 다시 마주 대하고야 말았습니다. 반딧불이 동무에 이어 이 친구의 정경을 마주 대하려 그랬던 모양입니다. 억새는 피고 나는 또 속절없이 습관성 연례행사 가을날 생가슴을 앓아야 하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