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동박새

조회수 11215 추천수 0 2013.04.04 03:39:10

(동박새)

 

 

관통.jpg

 

올 들어 처음으로 밤나무 동산 마른 풀잎 위로 날아오르는 키 낮은 아지랑이 한 무리를 만났습니다. 눈 가늘게 뜨고 유심히 잘 봐야 보입니다.

마냥 평온한 듯 반가운 정경 속에서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느낌 하나, 가슴이 덜컹하는 가운데 찾아오는 느낌 하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나가 찾아오면 넘치지 않도록 다른 하나는 떠나야 하는 산골짜기의 분명한 인연공식 때문일 겁니다.

 

아지랑이 추임새를 믿고 겨우내 방 한가운데 앉은뱅이 탁자에 내려뒀던 컴퓨터를 탁상 위로 옮겨놨습니다. 방석도 옮기고 무릎 덮개도 치웠습니다. 하마 넉 달만의 일입니다. 그간 계속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무릎도 시큰, 허리도 뻐근합니다. 오른다리 복사뼈 근처에 두텁게 내려앉은 굳은살은 처치가 곤란할 정도로 공고합니다.

컴퓨터가 앉을 자리는 드디어 제자리를 잡았어도 트럭, 불쌍한 내 트럭 고물이가 제자릴 잡으려면 아직 보름은 실히 더 걸려야 할 듯합니다. 햇살 각도가 워낙 좋은 뜨락 위편에서부터 바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어도 돌고 도는 오솔길, 정겨운 오솔길을 가득 덮은 눈 아닌 얼음은 녹아 줄 기미가 아직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솔길 옆 이 서방 네 다락 논에도 이제 겨우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니 평년 같으면 지금쯤 개구리들의 노랫소릴 밥반찬 삼을 만도 하건만, 오래 전 지난 경칩이 무색할 지경으로 그저 잠잠합니다. 이러다가도 하루 사이에 한꺼번에 와글거리는 개구리 녀석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어 염려하진 않습니다. 일면 딱하고 일면은 웃기는 녀석들이거든요.

따끈한 봄날 오후, 말갛게 끓인 쑥국에 찬밥 말아서 개구리 말고 개구리 노랫소리만 반찬 삼아도 그게 나로선 최상의 만찬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밤나무 동산에서 알밤을 찾아냈습니다. 어제오늘 각각 한 알씩 두 알, 토종밤입니다. 겨울동안 눈 밑에서 잘만 버텨낸 알밤인지라 속껍질을 벗기지 않아도 떫은맛은 전혀 없습니다. 얼고 녹기를 밥 먹듯이 했음에도 외형상 변화는 물론 윤기도 크게 탈색된바 없을 뿐만 아니라, 맛의 고소함은 표현하기 힘이 들 정돕니다.

아무리 우연이래도 난 알밤을 까먹을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약간씩 느끼긴 합니다. 내 몫이 아니라 다람쥐 녀석들 몫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처럼 기록적인 적설량일 경우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산뜻한 알밤을 모른 척 그냥 지나치기도 힘들거니와, 다람쥐 녀석들이 언제 겨울잠에서 깨어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에선 내가 먼저 취해도 할 수 없을 겝니다. 격언처럼 부지런한 누군가 먹이도 먼저 취한다고 했듯이 나중에라도 다람쥐 녀석들은 설마하니 모를 겝니다.

장담하거니와 일부러 알밤을 찾아 나서진 않습니다. 그저 우연히 가라앉은 나뭇잎 사이로 비어져 나온 저절로 숨어있던 것들일 뿐입니다. 그것도 시즌이 한참 지난 뒤 늦서리 재촉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떨어진 늦둥이들인 건 그간의 경험으로 확실합니다. 다람쥐 녀석들이 춘궁기를 대비해 알밤을 모두 땅속 깊이 파묻어 감춰 둔단 사실을 모른다면 그조차 차마 주워 들진 않았을 겝니다.

 

드디어 거실 안과 바깥 기온이 쉽게 역전됐습니다. 높은 곳은 허리, 낮은 곳은 무릎까지 여태 남아있는 지붕 테라스에 눈 아닌 얼음 때문입니다. 혹한기엔 이불처럼 실내 과냉각을 막아주던 빙설이 이때쯤이면 온도상승에 오히려 방해꾼이 됩니다. 한낮이라도 밖은 봄, 안은 겨울입니다. 몇 차례 눈삽을 들고 지붕에 올랐다가 해바라기 자세로 포근한 세상 구경만 하곤 그냥 내려왔습니다. 남아있는 얼음의 양도 아직 너무 많거니와 악착같이 치워야 할 이유 대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보일러 연료가 좀 더 드는 것만 참아주면 날짜가 어련히 알아서 치워갈 텐데 말입니다.

기왕에 올라간 걸음, 눈에 눌려 테라스에 가지 끝을 기댄 덕분에 운 좋게 설해목의 위기를 겨우 면한 밤나무가지를 억누르고 있던 언 눈만 슬쩍 치워줬더니 스프링처럼 잽싸게 몸을 일으킵니다. ‘어휴! 많이 힘들었습니다.’ 란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 내 허리가 다 편안해집니다. 작년에 거기서 쉽게 주워 올린 때깔 좋은 은혜, 통통한 알밤이 한 주먹은 된답니다.

 

‘또랑또랑’ 하루 온종일 실로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아 다양하게 허드렛물로 거저 사용하는 재미도 있기는 있습니다. 눈 녹아떨어지는 낙숫물이라도 아무렴 도시형 비싼 수돗물과 바꾸지 않습니다. 낮엔 봄 아지랑이에 낙숫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려도 일교차가 15도를 가볍게 넘는 골짜기 낙수그릇에 고인 눈물은 밤으론 아직 두텁게 업니다. 겨우 드러난 산책길도 새벽엔 서릿발이 ‘뽀도독’ 비명을 내지르는 어정쩡한 계절, 낮과 밤으로 의복의 입성이 달라져야 하는 헛되이 바쁜 계절이기도 합니다.

 

있으나마나 일 것 같은 방충망이 감각적으론 차이가 큽니다. 해서 무심코 통째로 열어놨던 창문을 통해 작고 여린 동박새 한 마리가 또 잘못 들어와 있었습니다. 다람쥐도 꿀벌도 활동을 개시하기 전인 이 계절에 말썽을 일으키는 건 아직은 새들뿐입니다. 늘 그렇듯 나갈 곳을 몰라 엉뚱한 서편 산으로 막혀있는 쪽 고정식 창유리에다 애써 작은 몸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번엔 별로 어렵지 않게 녀석을 붙들 수가 있었습니다. ‘할딱할딱’ 빠르게 맥박 치는 작은 동박새의 심장 고동이 고스란히 손을 타고 전해져 왔습니다. 따스한 체온을 간절하게 느끼며 북쪽 창문을 열고 손을 쑥 내밀었습니다. 곱게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동박새 녀석은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힘찬 날갯짓으로 초봄의 푸르고 너른 창공을 곧장 차올랐습니다. 방충망만 가만히 닫았습니다.

 

아! 화답.

그랬습니다. 처음 예사롭지 않았던 진한 느낌 하나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성깔은 꼿꼿하나 속 깊은 내 친구 동장군 녀석이 제 동생 동박새를 시켜 그렇게라도 내 작별인사에 대한 화답을 대리로 전하고자 했던 겁니다. 제 체온은 내게 남겨놓고 내 체온은 두 날개에 가득 담아갔습니다. 작별이란 늘 그렇듯 가슴 한구석 먹먹해 옵니다.

동박새가 사라진 아득한 북쪽 푸른 하늘엔 벌써 그리워지는 내 친구 동장군이 타고 갈 백설구름 한 조각 둥둥 떠 있었습니다. “안녕 동장군!”

 

** 자연수상록 ‘한 스푼’(어문학사)에서 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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