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물 긷기

조회수 10621 추천수 0 2012.01.26 00:18:51

(물 긷기)

 

대한 날부터 닷새 넘어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집안에 물이란 물은 모두 얼어붙었다. 주방 수도꼭지는 물론이려니와 보일러실이라 안심하고 있던 물 펌프까지 얼었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물을 거저먹긴 틀렸음이다. 하지만 이럴 줄 알고 대형 물통에 가득 받아둔 비상식수가 있어 대책 없이 멍청한 꼴은 겨우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산골짜기 외딴집에서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기어코 벌어지긴 했지만, 아무려나 난 걱정일랑 한 톨도 하지 않는다. 눈이 내려주시면 눈을 끌어들여 사용하면 그만일 테고 눈이 내리시지 않는다면 오고가는 오솔길이 대신 편할 테니 물통으로 하나씩 개울물을 길어 나른다 해도 어색함이란 하나도 없다. 원래부터 이곳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물론 허드렛물도 모자람 없이 사용하려면 제법 작지 않은 수고를 들여야 하겠지만, 혼자 쓰는 물의 양은 빤할 따름이다. 도시에선 일부러 비싼 비용을 들여 지출하는 운동비용이 이곳에선 소득이 있는 행위가 되니 그로서 그만이다.

 2005_0222Image0001.JPG

물통 하나 바가지 하나 들고 목도리에다 목장갑까지 끼고 나서는 이른 아침의 산책로가 별스러웠다. 겨우 남은 그늘진 눈길 위에선 밤새 언 눈밭의 뽀드득거림이 참말로 경쾌하다.

돌밭 경사로를 갈 짓자 옆으로 지나 천연 바위들로 함부로 울퉁불퉁한 냇가에서 물 흐름이 유독 격한 곳을 찾는다. 흐름이 완만한 곳은 얼음의 두께가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일, 멋대로 불거진 얼음 아래를 ‘돌돌 또르르’ 흐르는 물소리가 겨울도 한복판임을 고지 곧 대로 알려준다. 사방을 빙 둘러봐 바닥이 특히 말갛게 비치는 얇은 곳 얼음 바탕을 골라 동그란 차돌을 들고 몇 차례씩 쥐어박자 얼음이 쉬이 열리고 으아! 세상에 다시없이 투명한 옥수, 희나리 하나 비치지 않는 청수가 거침없이 앞으로, 미래로 내달리고 있었다. 밤새 그렇게 몰래 또 멀리 달아나고 있었던 게다.

잠시 목적과 함께 만사를 다 잊은 채 넋 놓고 바라보는 물길엔 한없이 투명한 겨울 아침 창공이 말갛게 비치고 있었다. 알알이 따로 따로 굴러 내리는 영롱한 물소린 옥구슬들의 자리다툼인 듯 서로 부대끼고 섞이는 몸짓이었다. 소름이 돋도록 맑음이 하도 기가 막혀 바라는 것도 없는 빈 눈으로 얼마라도 그렇게 멍하니 지켜볼 따름이었다.

하얗게 배어나오는 호흡의 김 서림 끝에 이어 쨍한 자극적 향기 한 줄금 냉큼 입안으로 달려든다. 한 모금 깊은 들숨 나도 모르게 꿀꺽 삼키면 아침나절 향기는 머리끝에서 폐부를 거쳐 내장 속까지 속속들이 적셔온다.

오래 멍청하게 앉아있을 순 없음에 퍼뜩 정신을 차리면 그새 냇물 튀긴 장갑이 얼어들어 아직 손에 들려있던 물돌, 차돌을 꽉 붙들고 있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지만 새벽 기운이 아직 차긴 찬가보다. 하지만 넋을 절반쯤 빼앗긴 난 잘 모르겠다.

바가지에 냇물을 조금만 퍼 올려 먼저 한 모금 입에 넣었다. 세상천지 겨울향기란 그 한 모금 안에 몽땅 녹아들어 있었다. 이도 시리긴 하겠지만 이보다는 머리에서 찡하는 울림이 깊다. 겨울 하늘로부터 심상으로 전해오는 영혼의 동기신호임에 틀림없으려니, 인간사 호사를 멀게 막아서는 오지 산골짝에서 다만 이것으로나마 깊이 있게 누려보라는 당부인가 싶다. 청명한 옥수 단지 한 모금이면 모자랄 리 없음이다.

 

세상에 다시없는 맑은 청수를 바가지로 떠올려 물통에 천천히 담는다. 한 방울이라도 허실이 없도록 십분 주의를 기울인다. ‘쪼르르 주르르’ 물통에 담겨지는 물소린 겨울의 서정이 뛰어와 담기는 소리가 무조건 한 바가지씩, 숭고한 시간의 과업을 무념 무색 중에 수행하는 엄밀한 과정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바람도 한 점 없다.

처음 같지 않은 처음, 그저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을 따름 중에 문득 난 지금 개울에서 무엇을 길어 올리는지, 통에 담겨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아득해진다. 모를 일이다. 심신이 하얗게 비워지는 삭제현상을 단지 받아들일 뿐, 할 일이되 미리 생각해 두지 않았던 돌연한 느낌이기에 그럴 것이려니와, 친구 동장군의 농밀함에 간단없이 함몰되어간다는 뜻일 것이다. ‘하늘이, 물이, 세상이 너무나 맑다’란 원초적인 느낌 하나만 겨우 남아서 맴돌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한 손엔 겨울 아침의 운치로 가득한 빈 바가지, 한 손엔 냇물로 가득한 물통, 가끔씩 오솔길 눈 위에 물통을 내려놓고 허리도 펴며 뒤를 돌아본다. 맑고 청아한 좀 전의 개울물이 차마 믿어지지 않기로 그러하다. 돌아선 김에 기왕이면 멀리 햇살에 머리부터 조금씩 젖어드는 산마을도 한번쯤 건너다본다.

손을 교대로 바꿔가며 두어 차례 쉬엄쉬엄 쉬면서 돌아와도 20킬로그램 물통 하나의 무게는 별 것도 아니다. 호흡도 적당히 올라있고 체온도 꼭 그만큼 올라있으니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가벼울 뿐더러 맑음을 무한히도 닮아있다. 이 순간의 심상이야말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통째로 맹물 표 일색임이다.

 

한 가지는 잘못됐다. 아침 일찍 목도리 채비까지 단단히 하고 나서는 산책길에 20리터 물통은 너무 컸음이다. 일부만 사용된 대형 비상수 물통에 ‘쏴-아’ 옮겨다 부으니 겨우 반 통으로 다시 가득 채워질 뿐 고스란히 남겨지고 말았다. 차라리 작은 물통을 이용했더라면 하루에도 여러 차례 개울 물 긷기의 고전적이고 야한 과정을 두고두고 가져 볼걸 그랬다. 어쨌든 비상 식수 물통이 짙은 청공 색으로 입구까지 찰랑댐을 바라보면 난 마음으로 불쑥 부자가 된다. 곁엔 반통이나 남은 옥수 물통까지 보너스로 기다리고 있다.

 

학마을 3.jpg

“부자 되세요!”

얼마 전 어느 분이 전해준 새해 덕담이 내겐 너무 일찍 성사됐다.

이젠 단지 페트 병 하나 내지 둘로 옥수 같은 냇물 아닌 보물을 길어 와야 할까보다. 반쯤 장난삼아 즐기는 깊은 산골짜기 냇가에서의 천진난만한 물 긷기 도정일지언정 남아돈다는 사실이 짐짓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감하기 절반, 이것이 깊은 산골짝 오지 냇가에 의지해 한겨울을 살아내는 오늘 누구네 행복공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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