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봄마중

조회수 16472 추천수 0 2013.03.18 05:57:17

(봄 마중)

 

꽃다지.jpg

 

“달캉 달캉”

따사로운 햇살이 너무 아까워 모처럼 문이란 문은 방충망까지 모조리 열어 제치고 겨우내 묵은 공기를 새 공기로 바꿔 놨더니 누군가 가만히 문을 흔들고 있습니다. 얼핏 창밖을 내다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동장군의 작별 인사는 아직은 아닐 테고, 겨우내 뜨락 백설 위에 던져 놨던 내 그리움의 지긋한 눈빛이 녹아내리는 소리도 아니었을 겝니다.

눅진한 습기가 부담스러웠던 실내도 아주 빠르게 말라감에 속이 다 개운해집니다. 빨랫줄에 내다 얹은 이불까지도 햇살에 햇살을 받아 온기가 한껏 올라갑니다.

 

건너편 북향 산등성이 골 깊은 음지는 아직 9할이 눈밭, 그러나 색 바랜 백설의 눈빛도 이미 설국의 강건함을 잃었습니다. 시험 삼아 밟아보는 눈 표면은 푸석거리는 소리만 깊습니다. 올려다보면 눈높이가 무릎만큼 낮아진 지붕 테라스에서 폭포 되어 쏟아져 내리는 낙수방울이 마치 진 보석인 냥 반짝입니다. 더 올라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청천을 바라보자니 벅찬 광휘가 차라리 내 눈을 감깁니다. 실눈도 부럽단 뜻입니다.

 

아침에 나가 본 개울물이 맑은 청록 빛에서 붉은 흙탕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눈과 추위로 한동안 멈추었던 도로 복구 작업이 드디어 봄날을 앞질러 탄단 말입니다.

장화 발로만 눈을 슬슬 밀고 지나간 침목다리 위도 말끔히 녹아 벌써 뽀송하게 말라있습니다. 남은 눈이 거의 사라진 포장도로엔 물기가 거의 없어 연례행사인 이른 아침 얼음지치기 행사는 올핸 기대치 말아야 할 모양입니다.

 

“달캉 달캉”

다시 누군가 창문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옵니다. 만사가 고요하기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뜨락 쪽이었습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곱게 묶어둔 내 그리움은 아닌 줄을 알기에 이번엔 내다보지도 않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그냥 혼자 놀다 가시란 뜻이지요.

 

참으로 긴 겨울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쳐들어온 혹한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1주일에 한차례 이상 눈 오시는 횟수도 가장 잦았던 겨울이었습니다. 결국 엊그제 내린 뼘치 눈으로 3미터를 꽉 채운 적설량이었지만 여느 해보다 힘은 덜 들었습니다. 골고루 나눠 옴으로써 단번의 폭설은 피해 줬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이력이 붙은 외딴 산마을에 겨우살이, 한꺼번에 왕창 쏟아져 준다 해도 그럭저럭 살길은 있었을 겝니다. 덕분에 병풍 같은 참숲 소나무들이 설해를 입지 않았음만 그저 은혜로 여기면 그만입니다.

 

수일 내 하조대 바닷가 시린 파도 머리에 마중 한번 다녀올 예정입니다. 작년 겨울 초입 달빛 가득한 트럭 적재함에 함께 실려 온 동장군 대신 이번엔 봄 처녀를 마중 나가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내가 잠시만 수고를 해주면 이곳 산골짜기 봄날은 그만큼 빨라질 걸요, 이젠 길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만큼 고즈넉한 한밤중을 골라서 한번쯤 다녀올 예정입니다. 산 그림자 은빛으로 짙은 달밤이면 더더욱 좋겠지요 만.

 

“달캉 달캉”

처음과 똑같은 소리 박자로 창문 밖에서 또다시 누군가가 부르고 있습니다. 부르는 청이 하도 정겹고 워낙 은근해 이번엔 아무래도 아는 척을 해줘야할 것 같았습니다. 한 모금 남아있던 찬 커피를 마저 입에 물고 가벼운 차림새 그대로 거실을 가로질러 뜨락으로 난 쪽문을 가만히 밀어봤습니다.

아하! 방금 전까지 말끔하던 묵은 눈밭 위엔 자그마한 노루 발자국이 진하게 새로 찍혀있었습니다. 시절이 정히 힘들 땐 콩도 배추도 나눠, 감자도 나눠, 그에겐 맹한 나로서 은혜로운 이웃으로 굳이 자리를 잡았을 진 몰라도, 겨우 한줌어치 은혜를 구태여 인연으로 엮고 싶지 않은 내 속셈, 구휼(救恤) 보시(普施)이되 무상공식임을 마저 다 아진 못할 겝니다.

그랬습니다. 눈 나라 깊은 산골짝에 기대어 혼자 사는 맹물 글쟁이 찾아온 노루 한 마리, 유난히 걸음발 느린 아랫녘 봄 아씨 함께 마중가자는 소심한 청노루가 내민 더 부끄러운 데이트 신청이었던 겝니다.

뜨락 묵은 눈밭을 얌전히 가로질러 밤나무동산 잔등너머로 자박하니 사라진 청노루 발자국, 그쪽은 틀림없이 봄 오시는 방향이었습니다.

 

** 자연수상록 ‘한 스푼’(어문학사)에서 전제 **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sort
539 광우병에 아들 잃은 영국 어머니 특강 쉬었다가자 2008-11-12 16766
538 2010 자전거농활단 참가자모집 imagemovie 박준형 2010-06-15 16714
537 [포토에세이] 왕사마귀 구하기 imagefile 고충녕 2012-08-30 16707
536 텃밭 지도사 아카데미 수강생 모집 imagefile 조홍섭 2013-02-25 16666
535 13일 밤 '별동별비'가 내려요 imagefile 물바람숲 2012-12-13 16632
534 [포토에세이] 비상! 비상! imagefile 고충녕 2012-05-08 16584
533 천리포수목원 숲해설가 전문과정 조홍섭 2014-01-22 16582
532 [포토에세이] 세상에서 둘째로 귀한 꽃 imagefile [2] kocyoung 2011-10-10 16549
» [에세이] 봄마중 imagefile 고충녕 2013-03-18 16472
530 제 1회 지역에너지 학교- 에너지 자립마을 어떻게 만들까?- 이유진 2011-07-04 16400
529 별밤 속 오로라와 함께 춤을 imagefile 물바람숲 2013-01-11 16388
528 초복 토크 콘서트-개는 왜 먹으면 안될까요 imagefile 조홍섭 2013-07-11 16337
527 [Q&A] 태풍이 궁금해요! -태풍에너지는 나가사키 원폭의 1만배 imagefile 물바람숲 2012-09-13 16270
526 조선호랑이 '대호'를 그리자 조홍섭 2016-02-01 16253
525 조홍섭기자님의 물바람숲을 링크연결하였습니다. chonsugi 2010-04-28 16202
524 핵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 강연회 조홍섭 2011-05-19 16200
523 아참마다 읽고 갑니다. 권희정 2008-12-01 16167
522 [걷기예찬] 빛이 신비로운 섬, 내도 imagefile 윤주옥 2012-03-13 16116
521 코리아 인터넷방송 kontv 보도입니다. pumuri 2010-11-15 16099
520 방사능 오염과 먹을거리 오염 한살림 토론회 조홍섭 2011-05-31 16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