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보리밭에서

조회수 18939 추천수 0 2011.10.11 00:31:04

보리밭에서

 

5월 하순 경 약간 덜 여문 가평읍 달전리 장승고개 정상부에 자리한 모 회사 교육연수원 부속 보리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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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원 입구 한 3-400여 평 너비의 텃밭에 참말이지 적당하게도 보리를 하나 가득 심어놨습니다. 물론 곡식농사를 위한 전업 보리밭은 아닙니다. 헌데도 다른 화훼나 보암직한 장식용 식생을 외면하고 하필 재래종 보리를 한가득 심었는가는 임자에게 묻지 않아서 알 순 없지만, 아무튼 하나씩 자꾸 사라져가는 우리네 옛 멋과 한갓진 정취를 잘 아는 넉넉한 심보를 읽을 수 있어서 나로선 그저 좋기만 했습니다.

 

6월 중순의 더위는 아침부터 맹렬했습니다. 딱히 정해진 계획은 없음에 그저 사진감 대상물 헌팅을 위해 동네 외곽을 여일하게 쏘다니던 중 마침내 더없이 적절한 대상물을 찾았음입니다. 한참 전부터 눈여겨 봐뒀던 요즘 찾아보기 드문 그럴듯한 농익은 보리밭과의 농밀한 데이트를 말함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오늘이었으니 더는 이리저리 떠돌 필요도 없이 오전부터 아예 맘먹고 곳에서 죽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야말로 딱 점지해 준 일진이랄 수 있음에 오전부터 날씨까지 그럴싸하게 그림 같은 구름도 펼쳐주시어 그저 감지덕지할 따름입니다. 촬영을 시작할 즈음 오전 10시 경 이를 데 없이 화창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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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으로 짙게 비춰드는 느티나무의 그림자를 보면 역시 오전 중 11시 경입니다.

정오 무렵 옅은 구름이 약간 덮여줘 더위를 잠시 물렀도록 해주고 있거니 부드러운 광선도 보리밭과 나와의 데이트를 감춰주려는 듯합니다. 톱라이트 즈음에 좋은 사진 나오기 어려우니 차라리 한숨 돌리란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난 한눈을 팔수가 없습니다.  

 

보리밭이 갖는 전래의 운치야 쉰 넘은 나이쯤 되는 인사라면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쳐도, 도시민 학이가 유독 농촌의 보리밭에 이토록 집착을 갖는 확고하고도 보다 절실한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그건 중학시절 나로서 첫 번째 글눈을 뜨게 해 준 잊을 수 없는 문장이 바로 한흑구 님의 명 수필 ‘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뒤론 오죽하면 앞으로 밀밭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속으론 보리밭을 그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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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드디어 서편으로 조금씩 치우쳐주는 오후로 접어들었습니다. 헌데 이즘에서 필연적인 큰 문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이제까지 찍은 사진이 100여 장을 넘어서자 디지털 카메라에 배터리 방전경고등이 들어온 때문이었습니다. 워낙 많이 쓰는 고로 물론 니켈카드뮴 충전지이지만 다시 재충전시킬 짬이 없음은 당연합니다. 할 수 없이 아랫동네 구멍가게로 달려가 급한 대로 1회용 건전지로 갈아 채우고, 물도 좀 마시고, 빵도 두엇 사들고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일회용인즉 더 바랄 거 없으니 예서 아예 오늘만 살고 말자는 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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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황금색 보리밭이라도 심심하면 옆에 어린 복숭아도 한편에 넣어줘도 예쁘고 기쁘거니와, 내 생전 언제 다시 이 같이 농익은 보리밭과 데이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면 단 한 시각인들 눈을 돌릴 수도, 자리를 뜰 수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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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를 넘기면서 드디어 합환을 장려하는 태양의 도움을 받아 마음으로 은근히 그리며 상상하며 기다리던바, 오늘의 하이라이트 한 장이 결국 나와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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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보리색깔과 태양광색이 같은 시간의 바탕 위에서 한가지로 합해졌습니다. 이젠 여간해서 찾아볼 수 없는 정형 싸리울과 잘 성숙한 느티나무에 어슷하게 비로드 빛 부드럽기 짝이 없는 6월 달 오후의 사광이 들이치고 있습니다. 덕택에 한낮의 후끈했던 열기 그것에서 한걸음 살짝 물러선 더위도 한결 견딜 만 했습니다. 기왕지사 봐주실 바에야 크게 봐주시려했던지 하루 온종일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기상이었습니다. 

 

결국 하루의 보리밭 축제가 이우는 오후 6시 경 그제까지 약 2백여 장이 약간 넘는 정취도 깊은 보리밭 사진이 남겨졌나 봅니다. 태양광선도 눅어지고 아쉬움이란 일점도 남김이 없으니 이젠 끝마쳐도 좋겠다고 생각한 대목에서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한숨을 돌리며 그제야 풀밭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말 미련스럽게도 어디건 때때로 걸터앉아 한 호흡쯤 여유를 부릴 줄도 모른 채 꼬박 하루 낮을 선 채로 그렇게 멍청하게 기압을 받았던 것입니다. 쓰러지듯 그렇게 풀밭에 주저앉아서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보리밭의 구수한 냄새가 코끝에 떠올랐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단 표현의 적절함도 그만큼 진하게 감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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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참말로 치열하고도 온통 흥분과 기쁨과 보람으로 점철된 하루였습니다. 학이 죽을 때까지 길게 두고 잊지 못할 찬연한 농익은 보리밭과의 데이트였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반듯한 정사라면 몰라도 숫한 야사를 통해 온갖 정분과 인연과 문학과 시들이 이 안에서 연결되고, 민중들의 뺄 수 없는 먹거리로서 모든 게 빈한한 궁한기 한 때를 감당하는 등 숫한 매듭으로 맺어졌던 전래의 사건과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고스란히 떠오를 만큼 너무나도 매력 매혹적인 보리밭이었고 그 안에서의 둥둥 뜬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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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후회할 뻔 했습니다. 역시 잔머리 굴리지 않고 내일로 미루지도 말고 단지 장승고개 정상부 보리밭에서 오늘만으로 끝장승부를 보고 말리라던 발상과 결연했던 의지는 절대적으로 옳았습니다. 멀지도 않은 바로 다음날 정오 무렵 일말의 미련 나머지를 안고 다시 찾았을 때의 썰렁하고 섭섭한 모습이기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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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처럼 까마득한 어제랄 수 있으니 불과 어제가 오늘로 전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학이로 인해 어느 농촌야사 일장은 이렇게 채워졌음에 결코 다시 쓸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각인, 꿈과 같이 흐른 보리밭에서의 하루였고 곧 바로 초본식물도 아닌 관상용 낙엽교목 단풍나무가 가득히 심어졌기로 언제 다시 기약할 수 없는, 이래서 또 하나의 농익은 과거, 농밀했던 옛이야기 전설로 황금색 보리밭은 냉큼 속해지고 말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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