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거미 굶는 날

조회수 14272 추천수 0 2011.10.01 02:14:45

거미 굶는 날

 

간밤에 비도 수월찮았거니와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짙은 안개가 온 동네를 감싸고 있습니다. 불과 수십 미터 앞에 있는 수풀이 그림자만 남기고 있음은 이곳에 이주한지 처음 보는 짙은 농도입니다. 덕분에 얼굴을 휘감아야 겨우 알뿐 평시엔 보이지도 않던 고성능 거미줄들이 제 자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알알이 매달린 물방울들로 말미암아 그물이 제 정체를 감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hunger0.jpg  

 

이로서 왕거미는 한참 동안 먹이 구할 가능성을 꼬박 접어둬야 할 겁니다. 습관처럼 가운데 정좌하고 있음 뭐합니까? 그냥 잠이나 한숨 더 자둬야 할 겁니다.

  살다보면 공치는 날도 없지 않을 것이고, 비 오시는 날이 너무 길다 보면 불가피 굶는 일이 길어질 경우도 왜 없달 것입니까, 이런 땐 모든 이웃들이 함께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위로 삼기로 그만이겠거니와, 누구는 그래도 거기서 형상적 아름다움 한 조각을 구합니다. 견디지 못할 어려움을 하늘은 부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자연의 짐승들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일시적인 어려움에 인간의 격조를 값싸게 내던질 필요란 없습니다. 잠시만 참으면 이제도 지나고 곧 모두가 제 길을 다시 찾으리니, 정의와 도의를 먼저 추종하는 자라면 결단코 위기 시에 외로울 리 없겠거니, 한시적인 것과 영구불변의 가치를 쉬이 바꿀 일은 없게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젖으면 젖은 대로 마르면 또 마른대로 어차피 굶어야하는 딱한 일진도 자연계엔 없지 않습니다.

 

비도 오시고 안개까지 깊었던 즉 오전까지야 그렇다 쳐도, 이후 하루 종일 기상이 맑고 바람도 좋은 덕분에 산천경계가 모두 뽀송하게 잘 말라주었습니다.

석양이 뉘엿해지는 무렵 꼬박 지켜보니 왕거미 녀석이 참으로 열심히 이번엔 ‘노랑코스모스’ 꽃밭에 기대어 다시 집을 짓더이다. 오랜 뺑뺑이돌기 성실한 수고 끝에 반듯한 새집이 완성되자 지치고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며 드디어 한가운데 정좌했습니다. 이젠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뭘 한들 안 되는 날이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새집에 저녁 첫 손님으로 받은 것이 하필 태양이었습니다 그려.

hunger1.jpg 

 

꼼짝 없이 ‘그물에 걸린 석양’ 꼴이 되고 말았으니 다 저녁때라지만 아직 만만치 않은 태양 열기에 행여 익을까 해를 떼어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그림은 막상 그럴싸할지 몰라도 거미 녀석은 또 다시 쫄쫄 굶을 수밖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이게 다 일시 운명이려니, 오늘 일진에 재수가 좀 많이 없었으려니 그리 알고 순종 순응할 밖에요.

 

그물망에 딱 걸려 더는 내려가지 못할 태양 덕분에 오늘 저녁은 정념으로 가득한 석양이 원 없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나는 좋고 왕거미 녀석이야 열심히 헛수고만 했지 온종일 굶어야하는 날, 습관처럼 한가운데 정좌하고 있음 뭐 합니까? 어서 빨리 지나가라고 일찍 자두는 게 좋은 이런 날도 살다보면 더러는 있으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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